오피니언 사설

국정 혼선, 대통령이 나설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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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각종 정책이 갈팡질팡한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한승수 국무총리가 어제 재발 방지를 당부했다. 그러나 총리의 당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혼선의 양상이 심각하고 그로 인한 정부의 신뢰 상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원인을 찾고 조직을 새롭게 추스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행정부 내 시스템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기강도 바로잡아 국민적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최근 혼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행정부 내의 문제와 행정부와 국회 간, 즉 당정협의의 문제다. 행정부 내에서 혼선이 드러난 최근 사례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와 자동차 산업 지원 등이다. PSI의 경우 참여 발표 시기를 두고 통일부와 외교통상부가 서로 이견을 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자동차 산업 지원의 경우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등 관련 부처 간에 손발이 맞지 않아 서둘러 발표해놓고 뒤늦게 부인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모두 부처 간의 이해와 의견이 달라 벌어진 혼선이다. 부처 간 이견이 있을 경우 이를 조정해 주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총리실에서 담당하지만 민감한 사안의 경우 현실적으로 청와대를 중심으로 조율하고 교통정리할 수밖에 없다. 이견을 조정하는 매뉴얼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행정부와 여당 간의 문제, 즉 부실한 당정협의의 사례도 많다. 대표적으로 ‘1가구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완화’를 꼽을 수 있다. 지난달 16일 정부(기획재정부)와 한나라당은 분명히 당정협의를 마치고 양도세 완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 법안을 처리해야 할 시점에서 한나라당 의원총회가 급제동을 걸었다. 정부에선 “(당정협의 당시) 반대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그때부터 반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당정협의인가.

최근 당정협의가 부실해진 원인은 크게 보자면 정치환경의 변화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권한이 작아지면서 입법부의 위상이 높아졌다. 대통령은 더 이상 집권당 총재가 아니다. 의원들을 줄세우던 돈과 권력도 예전같지 않다. 따라서 정부 부처가 대통령의 이름으로 여당에 입법을 요구해 받아들여지는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는 대통령과 행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과거처럼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통과시켜 달라고 법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사불란한 기강은 사라졌는데, 시대변화에 따른 사전 조율은 안 되니 쟁점 법안이 통과될 수가 없다.

대통령부터 여당을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의원들은 각각 독립된 헌법기관이 됐다. 정부가 국정을 끌어가자면 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장·차관들이 대의회정치에 보다 정성을 들여야 하며 중요 현안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여당의 정무적 판단은 행정부 입장에서 볼 때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헌법은 입법의 권한을 의회에 주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뜻을 위임받은 대표들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와 함께 의회의 권한은 커지게 마련이다. 정치환경의 변화를 놓쳐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