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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함부로 무릎 꿇지 않는 국민’의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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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꽤 오랜 세월 서울의 랜드마크 구실을 한 삼일로의 빌딩은 삼일고가도로와 함께 그즈음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의 열등의식을 다독여준 위안거리였다. 한국에 고층 빌딩 시대를 연 31층 건물 사진은 교과서에 실려 어린 눈을 사로잡았다. 85년 여의도에 선 63빌딩이 준 충격보다 몇십 배 더 센 인상을 준 이 건물은 제3공화국이 밀어붙인 제도적 근대화의 상징물이자 정책 성공의 홍보물로 한동안 우리의 자랑이었다.

삼일빌딩을 설계한 건축가는 김중업(1922~88)이다. 40년 전 한국인에게 서구적 고층 건물의 미학을 선보이며 박정희 정권을 도와줬던 그가 박 정권의 눈 밖에 나서 쫓기듯 외유를 떠나야 했던 건 아이러니다. 성정이 곧았던 그는 3공화국 시절 일어났던 서울 동빙고동 호화 주택촌 사건, 무너진 와우아파트 부실 공사, 청계천 주민의 성남시 이전 파동 등 정부가 벌인 졸속 건축행정과 부도덕함을 매섭게 질타했고 결국 8년여 해외를 떠돌아다니다 79년 10·26 이후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김중업에 대한 생각에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겹친다. 이번 주 열화당에서 출간한 『영화감독 신상옥-그의 사진풍경 그리고 발언 1926~2006』에 실린 삽화다. 남·북한을 오가며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산 신상옥 감독의 3주기에 맞춰 나온 이 책은 양쪽 체제 밑에서 김중업 못지않게 굴곡을 겪은 신상옥의 신산한 삶을 사진첩으로 보여준다. 그 중 한 점은 1962년 5월 16일 서울시민회관(지금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영화제 폐막식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제 마지막 날 시상식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최우수극영화상을 수상한 신 감독과 부인이자 여주인공인 최은희씨에게 트로피를 수여하는 순간이다.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놀랍다고 해야 할까. 최은희씨는 무대 위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고 있다. 하필 5·16 쿠데타 1주년이었던 날,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새로이 떠오른 절대권력 앞에 무릎 꿇은 여배우는 애처롭고 안쓰럽다. 글쎄, 좋게 보면 옛 서양 귀족부인의 인사법이라 칠 수 있겠으나 그건 좀 억지스럽다. 그보다는 이 땅의 주인님 앞에 떨고 있는 하녀꼴이랄까. 역사의 시침은 이미 20세기 후반을 향하고 있었으나 역사 발전에 입각한 시민의식은 여전히 유아기였던 셈이다. 신 감독은 이렇게 공을 들여 정치적 후원자를 만들었지만 결국 검열 문제 등으로 박 정권과의 관계가 악화됐고 나중엔 영화사 등록까지 취소당한다. 78년 1월 홍콩에서 납치돼 평양으로 간 최은희씨를 따라 신 감독 자신도 같은 해 7월 납치당해(?) 북으로 간다.

김중업과 신상옥은 한국현대사에서 나라님에게 핍박 받은 수많은 ‘종놈’ 중 하나일 뿐이다. 해마다 4월이 오면 4월 혁명을 아프게 돌아보게 되는 까닭이다. 햇수로 꼭 50년, 4·19 혁명의 외침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의 노래 속에 묻혀버렸다. 17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4·18 민주혁명 49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박찬세씨는 “민주·민족·통일 지향의 4월 혁명 이념 속에는 또 하나의 위대한 꿈, 평등가치 실현이라는 꿈이 잉태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평등은 인간의 존엄, 사회의 연대, 동등한 참여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무릎 꿇고 꿇리는 양반-종놈 이분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다.

4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청년은 오늘 칠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다. 반세기 전 당신들의 성난 얼굴을 기록 사진 속에서 찾아본다. 그때 젊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던 평등사회를 향한 열정은 오롯이 살아있는지.

정재숙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