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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이대로 21세기 외교 해내겠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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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외교부 선배들께, 김선일씨 사건이 발생한 뒤 최근 어느 신문 1면 제목은 '외교부는 말기암 환자'였고, '특권의식에 가득 찬 한국 외교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기사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제가 중동에 근무하던 2년 동안 그곳 교민들과 함께한 기억들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된 한국 선원들의 재판에 참석하고 실형을 막으려고 법원 관계자들의 환심을 사느라 노력하면서, 현지 발주처를 다니며 우리 업체가 받아내지 못한 미수금을 달라고 간청하면서, 객지에서 부상한 선원이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위로하면서 저는 과연 호사스럽게 무슨 특권의식을 누렸던 것일까요?

서울에 근무하는 외교부 직원들은 김선일씨 피랍보도 이후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신참 직원들까지 그의 죽음을 내 일처럼 여기면서 죄책감 속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특히 AP통신사에서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 사건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서 저희의 충격은 큽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수많은 민원전화와 문의전화 속에 섞여 있는 짧고 의례적인 질문으로부터라도 사건의 낌새를 알아채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외교부 직원들, 특히 이번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부서의 직원들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며 심리적인 자기검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전화를 받은 것으로 언론에 알려진 어느 후배의 진술은 자신의 부주의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환청을 현실로 이야기하는 가슴 아픈 자기부정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AP의 문의전화를 기억해내려고 스스로 무진 애를 쓰는 과정에서 우리 직원들이 자진해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 언론에 전해지면서 기정사실처럼, 마치 그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기나 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가슴 아픕니다.

이번의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 외교통상부는 많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체제로 어떻게 21세기의 외교를 해나가겠습니까. 600만 교민과 700만 여행자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을 본부와 재외공관을 합쳐 1500명 남짓한 직원이 아무런 강제수단도 없이 거뜬히 해내는 것이 당초 가능한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외교부에는 영사업무만 있는 것도 아니고 50년, 100년 앞을 내다보며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외교.안보.통상 업무에도 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이번 사건이 과거와 달리 간부나 직원 한두 명의 문책으로 끝나지 않고 외교 시스템의 개혁으로 이어져야겠습니다만, 요즘과 같이 감정적인 사회분위기가 어떻게 일을 몰아갈지 예측하기란 어렵습니다. 팔을 다쳤는데 성한 다리를 수술로 절단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운 마음입니다.

박용민 외교통상부 외무관

*** 이 글은 외교통상부 본부에 근무하는 박용민 외무관이 김선일씨 사태를 맞아 느낀 소회를 해외에 근무하는 외교관 선배들에게 띄운 편지글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