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링컨과 더글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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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1860년 선거에서 링컨은 불과 39.8%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일반 유권자의 투표가 보편화된 183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게다가 남부지역에서는 선거인 한 명도 획득하지 못한 절름발이 당선자였다.

차점자도40%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좀체 없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링컨이 이렇게 저득표 당선된 것은 민주당의 분열 덕분이었다.

민주당 지지표가 온건파 더글러스 (29.5%) 와 강경파 브레큰리지 (18.1%) 로 찢어진 반면 공화당은 후보지명대회에서 선출된 온건파 링컨에게 강경파가 승복하고 단합해 선거를 치른 것이다.

당시의 핫 이슈는 단연 노예제였다.

공화당은 노예제 철폐를 주장하는 북부에, 민주당은 노예제 존속을 원하는 남부에 세력을 펴고 있었다.

링컨의 입장은 노예제 철폐를 연방정부가 강요하지는 않고 더 이상의 확장만 막으면서 남부주들이 자발적으로 철폐할 때를 기다린다는 '노예제 제한론' 이었다.

이런 온건론은 첨예한 대립 속에서 설 자리를 잃기 쉽다.

그런데 링컨이 공화당 내에서 득세한 데는 그의 숙명적 정적 (政敵) 스티븐 더글러스의 공로가 컸다.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선거에서 거물 더글러스와의 명승부가 정치신예 링컨과 그의 온건론에 각광을 비춰준 것이다.

공화당이 링컨의 온건론 아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노예제 철폐가 어차피 시대의 흐름이라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반면 민주당 과격파는 노예제를 보호하되 그 궁극적 쇠퇴를 인정하는 더글러스의 '노예제 보호론' 에 만족하지 못하고 별도의 후보를 내 선거에 지고는 연방에서 탈퇴해 남북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3월 링컨이 취임할 때는 이미 일곱 주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한달 후 전쟁이 시작되자 네 주가 뒤를 따랐다.

이때 더글러스는 다시 링컨에게 큰 힘이 돼주었다.

노예제의 존속보다 연방의 존속을 지상과제로 여긴 더글러스는 대통령 특사로 지방을 순회하며 국론통일에 힘을 쏟았다.

미증유의 국난 속에 낮은 득표율을 가지고 취임한 링컨은 성실히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위대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겼다.

'위기는 곧 기회' 임을 우리 국민도 새 당선자와 함께 되새겨 볼 시점이다.

또한 국난을 극복한 링컨의 승리와 미국의 성공에 더글러스와 같은 훌륭한 패자의 공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도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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