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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교수 방북인상기]하.묘향산의 문화유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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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의 문화유산 답사를 남북한 양 당국에 신청할 때 우리는 전후 3차에 걸쳐 45일 정도 실시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것은 한 차례 답사를 보름 이상 넘기게 되면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끊어서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고, 닫혀 있던 세계를 처음 대할 때 오는 심리적 충격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을.겨울.봄, 최소한 3계절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방북은 평양과 묘향산 지역, 개성과 금강산지역, 그리고 함흥.원산과 백두산을 답사하는 것으로 계획됐다.

모든 것이 우리의 요청대로 받아들여져 1차 방북은 평양과 묘향산으로 정해졌고 평양에 온 지 닷새째 되는 날 우리는 묘향산으로 떠나게 됐다.

묘향산은 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 3도가 거기서 만나고 거기서 갈라지는 분계령 (分界嶺) 이 되고 있지만 답사와 관광지로서의 묘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 (香山郡) 향암리 (香岩里) 를 일컫는다.

그래서 묘향산을 가려면 거의 반드시 향산을 거쳐야 한다.

때마침 2년 전에 평양~향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돼 우리는 정체현상이 있을 수 없는 이 시원한 4차선 고속도로 1백50㎞를 한시간반 만에 달릴 수 있었다.

평양시내를 벗어나면서 창밖으론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들판에서 가을걷이 하는 바쁜 일손들을 볼 수 있었고, 개량식 살림집들이 마을을 이루는 북한의 농가 (農家) 를 스치게 되면 절로 눈길을 오래도록 거기에 두곤 했다.

낯설다면 낯선 풍광이건만 결코 내 눈에 선 바 없이, 들에는 벼가 익어가고, 산에는 솔나무가 의연히 푸르고, 냇물은 정겹게 흐르고, 길가엔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떨고 있었다.

내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충청도 어디메, 또는 서부경남 어디쯤을 가고 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향토적 동질성이 그렇게 느껴지고 있었다.

제법 넓은 안주들판을 얼마만큼 지났을 때 우리는 유서 깊은 옛 고을 안주 (安州) 를 아스라히 오른쪽에 두고 청천강을 건넜다.

이름보다 더 맑은 청천강은 그날 따라 한낮의 태양을 강하게 되비추면서 그 명징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반짝였고, 강변 백사장과 모래밭에선 이따금 고기잡는 사람,빨래하는 사람이 풍경화 속의 점경 (點景) 처럼 서정적으로 나타났다.

초행길일 수밖에 없는 타관땅을 지날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서 인연을 찾으면서 결코 나는 이 자연과 대지의 이방인이 아님을 증명해내고 싶어진다.

거의 본능적인 이 욕구는 나의 보잘 것 없는 역사적 지식을 총동원해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이 거란족을 보기 좋게 물리친 곳이 여기 어디메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고,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이른바 홍경래난 때 민초들이 분통을 터뜨린 아우성의 현장이 여기겠거니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내 직업의식이 발동해 미술사적으로 회상하자니 그 멋있다는 안주 백상루 (百祥樓)가 강 건너 저쪽에 있을 것만 같았고, 순조 때 화가인 임득명 (林得明) 이 '서행일천리 (西行一千里)' 라는 장권 (長卷) 의 시화첩 (詩畵帖) 을 남기면서 개성.평양.순안 등을 거쳐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또 여기 어디쯤이라는 것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청천강은 어느새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역사의 강이고, 조국의 강이 돼 낙동강.섬진강만큼이나 정겹게 다가오는데 흐르는 강물은 나그네의 이런 심사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하아얀 잔물결을 일으키며 여길 보란듯이 연방 손짓하고 있었다.

우리의 방북 목적이 북한의 문화유산 답사에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상 깊게, 그리고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곳의 자연과 그들의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평양에서 향산으로 가는 한시간반의 여정이 나로서는 너무도 아쉽도록 짧게 느껴졌지만 상상의 상념 속에서는 그 열배 이상의 영상이 스쳐갔다.

우리에겐 김소월의 시 '진달래' 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영변 (寧邊) 의 약산 (藥山) 을 저 멀리 비켜두고 줄곧 청천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 이윽고 향산에 다다르자 차는 향산 읍내를 거칠 것 없이 곧바로 묘향산으로 달려 이내 향산호텔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묘향산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중 하나로 꼽혀왔고, 전설상으로 단군 할아버지가 내려오신 성산 (聖山) 이며, 임진왜란 때 서산 (西山) 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애국 (愛國) 과 구국 (救國) 의 성지로 돼 있는 자랑스러운 산이다.

이 아름답고 신비롭고 장엄한 묘향산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적은 말할 것도 없이 보현사 (普賢寺) 다.

보현사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각 13층 석탑과 다라니 석당 (石幢) 을 비롯한 석조물과 김부식 (金富軾) 이 짓고 문공유 (文公裕)가 쓴 보현사 사적비, 그리고 수충사 (酬忠寺).명부전 (冥府殿) 같은 단아한 옛 목조건물이 있어 이 고찰 (古刹) 의 격조와 품위를 지켜준다.

특히 보현사는 그냥 큰 절이 아니라 북한 사찰들의 총본사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교박물관이 부설건물로 세워져 있다.

거기엔 각지에서 출토된 불상과 불구 (佛具) 들이 진열돼 있는데 금강산 유점사 출토 불상까지 여기 보관돼 있었다.

도판으로만 보던 그 유물들을 여기서 만나게 된 감회를 굳이 말해야 하겠는가.

우 리는 묘향산에서 나흘간 머무르면서 3개의 큰 골짜기에 있는 이름난 암자와 정자를 답사했다.

만폭동 계곡으론 인호대 (引虎臺) 라는 멋진 정자와 향산 제일암 (香山第一庵) 이라는 별칭을 가진 상원암 (上元庵) , 그리고 명성황후의 원당 (願堂) 으로 알려진 축성전 (祝聖殿) 까지 올랐다.

만폭동 계곡의 그 아름다운 경관과 빼어난 기상은 과연 북녘의 산만이 자랑할 수 있는 장엄한 것이었다.

이튿날은 40여개의 석종형 (石鐘型) 부도가 장관으로 늘어선 안심사 (安心寺) 부도밭을 거쳐 묘향산의 철쭉꽃이라 할 두봉화가 무리를 이룬 불영대를 찾아갔고, 그 이튿날은 서산대사가 기거하던 바위굴 암자인 금강굴 청허방장 (淸虛方丈) 과 계곡 그윽한 곳에 파묻혀 있는 비로암을 답사했다.

그것으로 사실상 묘향산의 대표적 암자는 대충 살필 수 있었고 묘향산이 자랑하는 폭포의 계곡들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묘향산 서쪽끝 법왕봉에서 산등성을 타고 동쪽으로 좋이 50리를 가야 다다르는 묘향산 상상봉인 비로봉에 오르는 등반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종주해 보지 못한 채 지리산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게 됐으니 내 어찌 묘향산을 보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짧은 여정으로도 일찍이 서산대사가 갈파한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반쯤은 알 만했다.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다.

오직 묘향산만이 그 수려함과 장엄함을 두루 갖추었다. "

그렇게 보낸 향산의 나흘밤은 꿈같은 여로 (旅路) 였다.

밤하늘엔 항시 은하수가 길게 걸쳐 있었고, 공해는커녕 향기로운 풀내음이 낮으로 밤으로 몸 가득히 배어 들어왔다.

그 맑고도 진한 향기는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선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보현사에 들렀을 때 나와 동갑내기인 '안내원동무' 에게 이 향기에 대해 물었더니 군락을 이룬 눈측백나무의 향이라며 여린 이파리 하나를 따주었다.

그 이파리는 묘향산 안내책 갈피에서 아직도 그 향을 발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진하게 남은 것은 '안내원동무' 의 애교 어린 설명이었다.

"어떻습니까. 향기가 정말 좋디요. 고래서 향기가 묘하다고 묘향산이랍니다. "

유홍주 영남대 교수.미술사, 사진 = 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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