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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연의 세계일주] 반바지 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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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스물넷, 터키 여행 때의 일이다. 항구도시 이즈미르의 밤. 시내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느닷없이 스무살 남짓의 어린 청년이 수작을 걸어왔다. 외국인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귀여운 어린 것(?)으로 결론을 낸 난 그냥 한번 씨익 웃어주었다 . 그런데 이 청년, 내 미소에 용기백배한 듯 갑자기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I want S.E.X !"

청년, 나를 거리의 여자로 오인한 것이다. 황당함에 몸서리치며 싫다고 소리를 꽥 질렀건만, 이 청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마디 던진다.

"Why? I Have Money!" - 왜? 나 돈 많아!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지폐 다발을 잔뜩 꺼내 세어 보이는 게 아닌가! 영어가 좀 안되는 청년, 아무리 '당신이 오해한 거라'고 설득해도 말이 안 통한다. 어쩔 것인가. 원초적으로 나가야지. 나 역시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난 너보다 더 돈 많아!

액수에서 패한 청년,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서는, 근처 현금인출기에서 더 인출해온 것이 분명한 지폐 다발을 코앞에서 흔들며 다짜고짜 달려들어 악을 쓰듯 외쳤다.

"I have many many money!" - 나 돈 무지하게 많단 말이야!

오호,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다! 이 유치한 싸움은 급기야 '우리집 엄청 커!'서부터, '우리 부모님은 ○○○야'까지, 유치원 아이들 수준의 대화로 이어졌으니…. 원을 형성하며 흥미진진 싸움을 구경하던 행인들에게는 때아닌 한밤의 이벤트였던 것이다. 벌개진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던 남과 여. 구경하던 젊은 신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그때 한참 인기를 구가하던 '스트리트 파이터'에 나옴직한 포즈로 내 손을 들어주며 이렇게 외쳤다.

"YOU WIN!" - 당신이 이겼어요!

정류장의 모든 이가 한바탕 웃어젖히는 것으로 어색했던 그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애송이 청년은 슬그머니 사라졌고,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나는 엉망으로 구겨진 체면을 수습하려 애쓰며, 영어가 유창한 그 신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신사 말인즉슨, 체제 붕괴로 일자리를 구하러 터키로 내려오는 상당수의 동유럽권 처녀가 쉽게 돈을 벌고자 거리로 나서는 바람에 밤에 다니는 외국 여자는 콜걸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여러분. 여행지에서 지나친 멋내기는 오히려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길. 짧은 반바지를 걸친 내 옷차림이 청년의 오해를 부추겼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이후 철저하게 여행자임을 티내고 다닌 필자. 품 넉넉한 긴 바지에, 목에 두른 카메라, 나침반과 지도에 가이드북, 물통까지. 난 여행자예요. 절대로 여행자라니까!

조정연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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