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개봉작&상영작] 쳔년여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7면

은막에서 사라진 뒤 3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해오던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지요코. 소규모 제작사의 PD 다치바나 겐야는 후지와라가 활약하던 영화사의 창립 70주년 다큐를 만들기 위해 인터뷰를 시도한다. 후지와라가 젊은 시절 소중히 간직하다 잃어버린 열쇠를 선물로 건넨 덕에 이야기는 술술 풀려나간다. 이 열쇠야말로 후지와라를 영화배우가 되게 한 첫사랑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소녀시절, 후지와라는 피를 흘리며 경찰에 쫓기던 한 남자를 하룻밤 숨겨준다. 일본의 군국주의 움직임에 반기를 든 조직의 일원인 남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라는 말을 남긴 채 만주로 탈출한다. 후지와라는 자신을 가슴 설레게 한 이 이름모를 남자를 찾기 위해 만주에서 촬영되는 신작영화의 '길거리 캐스팅'에 응한다.

현재시점에서 후지와라를 인터뷰하던 다치바나는 어느새 후지와라가 들려주는 회상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후지와라가 탄 열차가 마적들의 습격을 받게 되면, 카메라를 들고 이를 지켜보던 다치바나와 카메라맨 역시 실제로 함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다. 그러나 후지와라가 탈선 위기의 열차 문을 열어젖히면, 눈앞에는 사무라이들이 설치는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바로 후지와라의 다음 영화출연작의 무대다. 남몰래 후지와라를 흠모해온 다치바나는 매번 아예 극중인물로 변신해 후지와라의 조력자로 활약한다.

'천년여우'는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나 환상적인 줄거리만이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을 뒤집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지극히 사실적인데다, 과거와 현재.영화와 실제의 경계를 속도감있게 넘나드는 장면 전환은 '영화적'이라는 설명이 적합하다. 다치바나가 실은 영화사의 말단직원으로 후지와라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과거가 드러날 때는 젊은 다치바나와 현재의 다치바나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실사영화라면 대역배우나 화면합성 같은 복잡한 공정이 필요했을 이런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천년여우'는 애니메이션이 갖는 표현력을 극대화한다.

'천년여우'(2001년)는 만화가 출신인 곤 사토시 감독의 두번째 장편이다. 지난달 국내 개봉한 '퍼펙트 블루'(1998년)나 올 전주영화제에서 선뵌 '동경 대부'(2003년)까지 그는 실사영화만의 것이라고 여겨졌던 소재와 기법으로 애니메이션의 영토를 확장한다. 기법만이 아니다. 첫사랑의 운명이 마침내 드러나는 순간,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시각과 함께 아련하게 전해지는 감동의 여운은 여느 실사영화 이상이다. 9일 개봉 예정.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