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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여과없는 저질비방성명 보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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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노자 (老子)' 에 '다언수궁 (多言數窮)' 이란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궁지에 빠지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대선 막바지의 대선후보들과 정치판의 꼴을 보면 노자의 말에 절로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말로 몰고 몰리는 판세나 말로 말미암은 곤궁스러움을 겪는 그런 따위보다 문제는 본질적인데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그것은 후보나 정당들이 말로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입을 통해 내뱉는 말은 씨앗이 되는 법인데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정녕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흔히 말로 짓는 죄는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망어 (妄語) 다.

거짓말.헛된말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남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거짓말과 헛된말을 '망어' 라고 한다.

이에 비해 망언 (妄言) 이란 망령된 말, 떳떳하지 못하고 도리 (道理)에 맞지 않는 말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는 양설 (兩舌) 이다.

한 입에 혀가 두 개라는 뜻의 말인데,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는 이간질 따위도 이에 속한다.

셋째는 악구 (惡口) 또는 악언 (惡言) 이다.

남에게 나쁜 말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내뱉는 혀를 악설 (惡舌) 이라고 한다.

넷째는 기어 (綺語) 다.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을 일컫는 말이다.

'기어' 란 남에게 욕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욕보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도리에 맞는 것처럼 꾸미는 고도의 술수로 죄짓는 것을 총괄하는 말이다.

정치판에서 횡행하는 말들은 직설적인 '망어' 나 '악구' 보다 '양설' 이나 '기어' 인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기어' 의 범주엔 신문 등에 쓰여지는 글도 포함된다.

'우리말사전' 의 풀이를 보면 '기어' 란 '신문 등에서 묘하게 잘 꾸민 말' 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풀이는 결국 글을 쓰되 진솔하게 쓰지 않고 꾸며 쓰는 글의 '죄' 와 '업' 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의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나 짓고 있는 죄는 많은 독자와 시청자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정치판이 이 꼴이 되고, 경제가 이처럼 파국에 치닫게 된 책임도 언론에 적지 않이 있다는 질타의 소리가 높다.

이런 비난과 질타에 대해 언론은 겸허한 자세로 수용하고, 뼈를 깎는 반성을 통해 거듭나는 노력을 해야 할줄 안다.

정치판에서 저지르고 있는 말과 말의 죄짓기에 언론이 아무런 여과 (濾過) 없이 그대로 동조 또는 동참해 보도하는 관행은 하루 빨리 시정돼야만 할 것이다.

가령 정당의 대변인 성명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대변인들이 내뱉는 저질의 비방성명은 원초적으로 언론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것은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사실보도와 진실보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쉽사리 얻어질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저질의 비방을 일삼는 일부 대변인과 부대변인의 말이나 성명은 '말' 또는 '성명' 을 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전혀 별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엔 언론은 사실보다 진실을 중시하는 입장에 서야만 한다.

물론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일이 그렇게 손쉬운 것만은 아닌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그것을 가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도 아닐 것이다.

요즘의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양심선언' 과 관련된 보도 역시 문제의 상황인식이 소홀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언론은 '양심선언' 이란 말을 너무 선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그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날의 어두웠던 군사독재시대엔 일련의 '양심선언' 이 지니는 무게나 의미가 그야말로 역사적이었으며, 그것을 언론이 선호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당시의 '양심선언' 이란 대개의 경우 종교계.인권단체의 검증과 뒷받침으로 이뤄진 것이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보도된 양심선언 또는 폭로를 보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심선언' 이고, 지난날에 언론이 선호했던 범주의 것에 속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특정정당의 알선과 연락으로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정략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일컬어 '양심선언' 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것들을 언론이 크게 보도함으로써 정치판의 혼탁에 가세하고 국민의 선택을 헷갈리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업' 을 쌓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미디어선거라고까지 규정되고 있다.

물론 미디어선거란 뜻엔 'TV선거' 라는 함의 (含意)가 강하게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TV를 통한 선거의 비중이 커질수록 신문의 기능이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책임 또한 커진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TV는 이미지의 영상화가 주조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허상 (虛像) 을 시청자에게 전달할 염려가 크다고 일컬어진다.

이런 것을 바로잡고 허상 아닌 '참모습' 과 '진실' 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신문의 몫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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