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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⑮ '태백산맥' 의 작가 조정래<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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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작가 조정래와 화수 조영남이 친구라고? 이번 인터뷰는 이런 부조합에서 시작됐다. 너무 진지해 ‘조진세’라는 별명을 가진 조정래와, 진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수 조영남의 만남. 그러나 조정래 앞에서 조영남은 모처럼 진지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래는 조영남의 약점을 너무 많이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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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만 증명하라는 법 있나요? 내가 믿었던 것, 내 진실을 세상이 받아주리라는 확신이 증명된 셈이지요. 고생한 보람이 있죠.”대하소설 <태백산맥> 200쇄 돌파에 즈음한 작가 조정래(66) 씨의 소회다. 1983년 집필을 시작한 <태백산맥>(전 10권, 해냄)은 이념의 금기지대를 깊숙이 파고들며 분단문학의 최고봉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 한국문학 다본권 중 첫 200쇄 돌파다. 10권 합쳐 700만 권 이상 팔렸다.

'20년 글 감옥'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았어요?"

그러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는 1994년 ‘구국민족연맹’ 등 8개 단체가 작가와 출판사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고발한 후 검찰이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다며 무혐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무려 11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달렸다.
작가는 <한강> 집필을 중단하며 검찰의 자료조사에 응해야 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확신이 있었기에 그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태백산맥> 200쇄 돌파를 기념해 작가 조정래가 가수 조영남을 만났다. 둘은 40년지기 인연. 조영남이 미국유학에서 막 돌아왔을 때, 그가 신학을 공부하며 쓴 논문을 조정래가 <한국 청년이 본 예수>라는 제목을 달아 책으로 발간해 줬던 것.

당시 조정래는 문학지 <한국문학>의 주간이었다. 조영남이 첫 번째 이혼했을 때 맨몸으로 찾아갔던 집도 조정래 부부 집이었다. 소문이 안 날 만한 집이 조씨 부부 집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단의 소문난 잉꼬부부인 조정래 씨는 부인 김초혜 시인과 함께 인터뷰가 약속된 식당에 30분 가량 일찍 나타났다.

김초혜 시인은 식당 문 앞까지 남편 조정래 씨를 바래다주고 자리를 떴다 인터뷰가 끝날 시간에 맞춰 다시 데리러 왔다. 그것이 이들 부부가 사는 방법이라고 했다. 조정래와 조영남은 적당히 서로 높이고 낮추며 2시간이 넘는 대화를 이어갔다.

조영남 오랜만입니다. 김초혜 여사가 운전해주는 차 타고 왔어요?

조정래 물론 같이 왔소. 이제는 기사가 있지. 집사람은 원래 겁이 많아 운전은 직접 못해요. 바쁘죠?

조영남 늘 그래요. 참, 제가 3월29일부터 부산에서 전시회를 해요.

조정래 그림 전시회? 가수면 노래만 해야지, 무슨 그림 전시회요? 조영남은 너무 겸손이 없어요. 왜 지구상의 인류가 20세기까지 문명시대를 거쳐오면서 분업을 했는지 알아요? 사회가 다양성과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이었소. 중세에는 작가들이 시·희곡·소설·수필·평론까지 혼자 다 했어요. 그러다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전문화하고, 시와 소설, 희곡이 따로따로 분화하고 전문화했는데, 조영남이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른다는 것은 아직 중세시대 인물로 자기 재능에 대한 과신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오. 조형이 벌써 몇 번째 그림 전시회를 하는 것은 ‘나는 화가다’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정작 한국 화단에서는 조형을 화가로 취급하지 않지 않소? 그게 가수 조영남의 비극이오.

조영남 하하하. 맞습니다.

조정래 그림도 하고 음악도 하다가는 다 엉망이 되지, 뭐.

조영남 그런데, 조 선생님이 책을 많이 팔아 화폐의 여유가 생긴 것은 세상이 다 알잖아요? 나 같은 경우에는 한 여자하고 사는 것이 지루하니 돈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러 여자를 만나 흥청망청 썼는데, 조 선생님께서는 돈 벌어 뭐하세요? 방금 나를 쳐다보는 것이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인 것 같기는 한데….

조정래 글쎄 이게 문제요.

조영남 이게 문제라뇨?

조정래 아니, 여자가 무슨 노리개나 장난감이오? 돈 여유가 생겼다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꾸고, 갈고 하게. 조형의 그런 사고방식은 좀 곤란해요. 왕권과 함께 남자의 권한이 절대화됐던 시대가 봉건시대였소. 그 시대에는 경제력으로 여자들을 몇씩이나 거느릴 수 있는 남자 횡포의 시대였소. 여자를 경제적 소유물로 삼는 그런 악습이 나빠 끝없는 혁명을 일으켜 봉건시대를 종식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엮어내고 또한 일부일처제가 만들어진 것이고….

조영남 아, 민주주의 시대에 의해 일부일처제가 됐구나.

조정래 그러면서 인권 존중의 시대가 온 거요. 조영남처럼 돈만 있으면 여자를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오. 여자에 대한 모독이고. 모든 여성단체에서는 조영남 같은 악당을 매도해야 해. 여자가 오락물이오? 인격체지! 여태껏 조영남과 인터뷰한 사람 중 이런 말 하는 사람 없었지요?

조영남 조 선생님은 한 여자하고만 살아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건 그렇고, 오늘의 나를 키운 사람이 대한민국 종로통에만 200명이 넘어요. 그런데 사실은 조정래 선생님이 나를 키운 첫 타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조 선생님의 잘못이지요. 나의 방종과 무윤리를 방조한 책임이 바로 조 선생님한테도 있다 이 말이지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내 신학대 졸업논문의 멋진 제목에 화투 그림까지 표지에 박아 출판해준 사람이 조 선생님이었잖아요? 그런데 1981년인가? 내 결혼기념 파티에 와서 다 망쳐놓고 갔던 거 기억해요?

조정래 그래요. 기억해요.

조영남 그날 당시 주한미군 중 최고위 인사였던 브래드너와 조 선생님이 싸웠잖아요? 너희 미국이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지 않았느냐면서. 그때는 조 선생님이 유명한 소설가도 아니었다고요. 그런데도 브래드너를 궁지로 몰아넣었어요. 우리 좌중 열댓 명은 이 일을 어쩌나 싶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고. 남의 파티에 와서 대판 싸우고 간 사람이 나를 부도덕하다고 매도할 수 있어요?

조정래 하하하…. 그때가 내가 <태백산맥> 쓸 구상을 다 한 상태였기 때문에 분단의 원인도 완전히 분석했을 때였거든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 <태백산맥>의 핵심 문제들 중 하나인데, 중요한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없었지요. 그때 말 안 하면 언제 해요? 그래서 마구 공격해댄 것이었지요.

조영남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왜 소설을 쓰는지 잘 몰랐어요. 왜 그 긴 이야기를 쓰는지? 읽기도 불편하게. 그런데 나이가 드니 ‘아,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더라고요. 조 선생님이 <태백산맥>을 쓰기 시작한 것이 마흔 살 때였죠?

조정래 예. 1983년, 마흔 살 때였습니다.

“그림 그릴 돈 없어 문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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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출발점이 있었어요. 피카소를 비롯해 야스퍼 존스·필립 가스통 등이 내 출발점입니다. 조 선생님의 본류는 무엇입니까?

조정래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반이었어요. 그런데 미대에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의 한마디는 “야 이놈아, 물감값 대줄 돈 없다”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물감이 굉장히 비쌌어요. 그래서 화가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헤르만 헤세가 말년에 글이 안 될 때 그림을 그렸어요. 나도 말년에 글이 안 되면 그림을 그리든 붓글씨를 쓰든, 둘 중 하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영남 그것이 조 선생님 글의 본류와 무슨 관계죠?

조정래 예, 들어보세요. 우리 아버지는 승려이면서 시조시인이었어요.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만당’이라는 승려 비밀결사를 만들어 독립투쟁을 하셨죠. 아버지가 재무위원이었어요. 아버지가 시조를 하셨던 것도 만해 선생이 독립투쟁의 한 방법으로 시를 쓰셨던 것에서 영향을 받으셨던 거죠. 나는 논산에서 6·25전쟁을 맞았고, 10리가 넘는 피난지 장터를 포목장수로 포목짐을 지고 오가야 했던 아버지는 꼭 나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 배고프고 먼 길을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면서 고시조도 읊고, 당신이 지은 시조도 읊고 그랬죠. 나의 문학은 시조로부터 시작된 셈이에요.

조영남 아~,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조정래 그러니까 내가 문학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는 미대에 못 가서입니다. 그림 대신 제일 자본이 안 드는 문학을 선택한 것이죠. 문학은 펜과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되니까. 글 쓰는 일은 남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고, 꼭 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고요.

조영남 그러면 소설 중에서는 <닥터 지바고>가 좋았어요, <죄와 벌>이 좋았어요?

조정래 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좋아했어요. 특히 빅토르 위고는 사회의식과 문학성을 아주 모범적으로 조화하고 승화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지요. 도스토옙스키는 너무 자의식적에 치우치고 요설적인 데가 많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조영남 그런데 <태백산맥>이 당시 사회 정서와 부닥치면서 조정래가 저항작가가 됐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쓰신 것은 무턱대고 그냥 용감했던 거예요, 아니면 어떤 계산이 있었던 거예요?

조정래 1979년에서 1980년으로 넘어갈 무렵, 나이 마흔을 바라보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점검해 보니 내 문학이 별로 남을 게 없었어요. 그때 벌써 8권을 썼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기비판을 하게 되었지요. 나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작가였는데, 한국 문단에는 전체 평단이 내린 하나의 규정이랄까, 정의가 있었어요. ‘한국문학의 원류와 본류는 분단문학이다’ 하는 거였죠.

조영남 아하!

조정래 분단이 그만큼 중대한 민족적 문제이고, 통일은 반드시 풀어야 할 민족적 숙원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학작품은 그 작품을 있게 한 모국어의 자식이에요. 작가는 자기의 작품을 있게 해준 모국어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모국어 발전에 공헌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어요. 그런데, 모국어는 모국어를 함께 쓰는 공동체의 자산입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 공동체가 겪는 갈등과 아픔, 문제점을 반드시 증언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가 있죠. 그것이 화가나 음악가와 다른 작가의 사명이에요. 제가 봤을 때 우리나라 작가에게 그 사명은 분단문제를 제대로 써내는 것이었죠. 분단상황에서 남한에는 국가보안법, 북한에는 형법이 있어요. 모든 작가는 그 법에 저촉되지 않는, 국가보안법이 용인하는 글만 쓰게 되는데, 그건 반공문학이지 분단문학이 아닙니다. 그런데 평단이 ‘분단극복문학’이라는 말을 한마디 더 해놨어요. 그 말은 금기를 넘어가라, 국가보안법을 넘어가라는 것이죠. 그런 문학적 요구와 임무 부여의 시각에서 내 작품을 돌이켜보니 다 쓰레기처럼 보였던 겁니다.

조영남 그걸 마흔에 느낀 거예요?

조정래 마흔 직전이었죠. 새로운 의식으로 색다른 작품을 써야겠다는 결심 아래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을 쓸 계획을 세웠어요. <태백산맥>을 구상할 때 이미 <아리랑><한강>의 제목을 다 정해놓았고, 100년의 이야기를 쓸 그림을 다 그려놨죠.

조영남 이야! 엄청납니다.

조정래 그래서 조영남 씨를 만났을 즈음, 나는 그 이야기들에 취해 있었으니 술자리에 앉아서도 만날 그 이야기만 했던 거지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싶고, 확신을 얻고 싶고, 확인받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 일방적 욕구가 술자리 분위기까지 다 깨버리고는 했던 거지요.

조영남 하하하.

조정래<태백산맥>을 쓰기 시작할 때가 1983년인데, 그때는 전두환정권이 극심한 폭압을 할 때여서 대학생들 시위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1985년이 돼서야 시위도 일어나기 시작했죠. <태백산맥> 1회분을 잡지사에 써 보내고 2회분을 쓰고 있을 때, 새벽 1시쯤이었는데, 이대로 써나가다가는 분명히 정권으로부터 위해를 당할 것 같은 거예요. 미리 집사람한테 말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말했어요. “<태백산맥>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계속 써나가다가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다. 그때 당신이 애 하나 데리고 견딜 수 있겠느냐”고요. 집사람도 갑작스러운 말에 충격을 받았겠죠. 한동안 침묵하던 아내는 “작가가 쓰고 싶은 것을 못 쓰면 작가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염려 말고 쓰고 싶은 거 다 써라.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어쨌거나 그런 저런 이야기들은 외부적 요건들일 뿐이고, 내가 <태백산맥>을 쓴 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었던 그 어떤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조영남 결국 <태백산맥>으로 인해 고발당해 조사받았는데, 그런 일을 당하고 세월이 흘러가고 하면서 내 생각이 너무 한쪽으로 쏠렸다거나 당시 내 생각이 조금 잘못됐었다, 그런 생각은 안 듭니까?

조정래 전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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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이적성 시비에도 후회 없어”

조영남 전혀?

조정래 예. 내가 1994년에 고발당했는데, 이미 1986년에 1부가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반응이 엄청나게 커지자 그 다음해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수사기관이 내사를 시작했어요. 경찰·검찰·안기부·보안사까지 다 조사했죠. 심지어 국회 문공분과위원회에서는 조정래를 체포해야 한다고 결의하자는 말까지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계속 2부, 3부를 써나가면서 내가 견지한 것이 무엇이었겠어요?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성과 엄정성, 그리고 확실한 사실의 기록이었어요. 그 기준을 지키는 것만이 작품의 생명력을 확보하는 것이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요.

조영남 그런데 왜 그런 것으로 고발을 당한 거예요?

조정래 예, 그게 문제인데요. 먼저 <태백산맥>은 무엇을 쓴 소설이냐 하는 근본적 이해가 필요해요. 한마디로 <태백산맥>은 우리 민족의 숙원이자 비원인 통일을 이루어가는 데 문학적으로 기여하고자 했던 응답이었어요. 그러니까 남북이 통일하려면 서로 욕하고 대결하지 말고 서로 잘잘못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이해할 것은 이해해서 서로 믿고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근본 입장입니다. 그에 따라, 첫째 반공주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자나 빨치산을 악마나 흡혈귀라고 가르쳤던 것을, 나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빨치산을 인간으로 승격시켜 ‘인간선언’을 한 거예요. 둘째는, 전쟁 통에 인민군만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우리 경찰이나 국군, 그리고 미군도 잘못한 일이 있다. 그걸 솔직하게 쓰자 하는 것이 제 입장이었죠. 그러니 반공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발할 수밖에요.

조영남 그랬군요.

조정래 내가 11년간 조사받았어요. 검찰이 요구하는 객관적 자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가 국가기록물일 것. 국회 기록물이 여기에 속하죠. 둘째는 나라의 납본필증을 받은 책의 기록. 셋째가 행정부의 기록. 그 외에는 안 돼요. 내가 체험한 사실도, 내가 취재한 것도 다 인정 안 해요. 그런데 경찰 조사 때 내 고발장의 고발 항목이 500개였어요. 한국 사법 사상 제일 긴 고발장이었다고 합니다. 검찰에서 그것을 120가지로 간추렸어요. 1주일 유예받고 <한강> 집필을 중단하고 그 120가지 항목에 전부 ‘객관적 자료’를 갖추었어요. 자료를 전부 준비했더니 책으로 17권이에요. 거기에 일일이 ‘포스트잇’을 붙여 갔습니다. 그때 포스트잇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자료 보퉁이를 갖다 냈더니 검사가 깜짝 놀라는 겁니다.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읽으라는 것이냐고. 그래서 “다 읽을 필요 없다. 다 표시해 왔다”고 하자 얼굴이 환해지더군요.

조영남 이야, 멋지다!

조정래 그랬더니 나를 무혐의 처리했어요. 생각해봐요. 내가 집사람과 아들의 안위를 앞에 놓고 쓴 글인데 자료 없이 썼겠어요? 그 말은, 그렇게 명확한 자료가 있음에도 우리의 반공주의는 내가 거짓말한 것처럼 몰아세웠다는 거예요.

기획·정리■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hyolim@joongang.co.kr] 사진■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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