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의 세상풍경]I'm F(failure)! 나는 파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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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말을 잊는다. 무너져버린 모래성 앞에서 거듭 말을 잊는다. ‘닉스(NICs:신흥공업국)’니 ‘4룡’이니 하더니 어언듯 OECD(경제협력개발기구)회원국. 이렇게 절로절로 선진국민이 되는 줄로만 알았건만. 허구한 날 북한이 망한다고 난리를 치던 게 엊그제였구나. 역사 이래 우리가 배고파서 쓰러진 적이 없는데도. 가슴 쓰라릴 일이 아니다. “올 것이 왔구나/온다더니 왔구나”(5·16 군사혁명의 급보를 전해 들은 윤보선 대통령의 첫 반응)는 표현이 어쩜 그토록 걸맞는지. 얼마나 거품을 말했나. 비틀림의 끝은 분명 추하리라는 무수한 경고들. 다들 눈 멀고 귀 먹은 시늉을 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허공을 떠돌던 말이 끝끝내-. 르네 데카르트의 명저 ‘성찰’을 곱씹으면 어떠리. 인간은 ‘현존하기 때문에 존재(existo, ergo sum)’하는 게 아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cogito, ergo sum)’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 가벼웠다. 그래 이제사 뒤로 걸을 수 있겠구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될 거야. 아니야. 행복지수를 새로 쌓는 거야. 반강제로 승용차 출퇴근을 금지조치 당한 기업의 한 고급간부 말을 옮기면 눈물이 솟을지 몰라. “10여년만에 버스·전철을 탔는데 그곳에도 우리의 아름다운 형제자매가 있더라고.” ‘그곳에도’라니. 정말 기분 나쁜 표현이지만 이제 그대들도 다시 눈을 뜨는구나. 기꺼이 용서하리. 그러나 우리 다함께 잊지는 말자꾸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아시아 국가의 부패한 관료자본주의적 성향을 말하면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점을 지났다”고 했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마구 밟는 수밖에…. 모리스 돕의 지적까지 전해 줄까. 추적곡선이론-“차를 타고 질주하는 주인을 향해 달리는 개. 순간순간 주인을 향해 뛰다 보면 개의 궤적은 포물선을 이룬다. 사람이라면 예상 위치를 잡고 일직선으로 달려갈 테지만.”(여기서 개의 생리는 후진국의 경제개발 노선을 상징)슬프다만 참 다행이다. 만약 그냥 갔더라면 어느 날 내리막 길에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신세가 됐을 걸 아마. 이제 호흡을 가라앉히시길. 그리고 무릎을 꿇고…겸허하게…후손들의 주머니까지 앞당겨 털어먹은 당대인의 죄값을 치러야 하리. 제각각 ‘IMF(국제통화기금)/I’m a F(failure:파산자·실패자)’라는 불명예 명찰을 달고서. 그렇게 하염없이 속죄의 길을 가다보면 저만치,작지만 튼튼한 깃발 하나 펄럭이고 있으리. 그림=최재은·글=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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