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준의 프레임24]심야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은밀한 매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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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80년대초,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한때 심야극장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까지 주로 야한 영화를 상영했던 이 새로운 풍속은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에로영화의 심야상영이 주는 불건전한 이미지에 여론의 비난과 법적 규제가 뒤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취를 감췄던 심야상영이 요즈음 영화문화의 한 부분으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화 홍보를 위한 심야 시사회에 관객들이 몰리고, 올해 열린 몇몇 영화제의 심야상영 프로그램은 예외없이 매진 사태를 기록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심야상영에 관객들이 열광하는데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의 심야영화현상은 80년대의 심야극장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80년대의 심야극장이 관객들의 음습한 (?) 취향에 기댄 흥행수단이었다면, 90년대 심야영화의 관객은 주로 젊은 매니어들, 곧 영화에 대하여 진지한 열정과 왕성한 관심을 보이는 수용자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에게 영화보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며, 극장에 가는 것은 음악회장이나 미술관을 찾는 것만큼 의미있는 문화생활이다.

시사회장, 컴퓨터통신, 영화잡지, 그리고 영화제는 이들의 목소리와 취향이 만들어지고 반영되는 마당이다.

이 마당에서 조금씩 활동 영역을 키워 오면서, 이들은 할리우드 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상업성에 영화문화가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 왔다.

90년대의 심야영화는 이들이 개척한 또 하나의 마당인 셈이다.

그래서, 심야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안에서는 일반 상영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주류 상업영화에서 한 걸음 떨어진 대안적인 영화를 보러 모여든 관객들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이들은 함께 밤을 새우는 의식을 통하여,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심야영화는 축제로서의 영화보기의 공간이고, 짧지만 매혹적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며,점점 획일화 되어가는 주류문화의 취향에 대한 작은 저항이다.

따라서 지금의 심야영화는, 위로부터 주어진 문화행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을 가능성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야영화는 예외적인 이벤트에 머물러 있다.

80년대의 심야극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심야상영이 아직도 규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좀더 자주, 좀더 많은 사람이 심야영화의 매력을 느낄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철없는 영화광의 투정에 그쳐야 할까?

(참고 : 300석 미만의 소극장은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시행규칙>에 따라 자정 이후의 영업이 원천봉쇄되어 있고, 300석 이상의 극장은 심야상영을 할 경우 관할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함)

김홍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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