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화류관문, 금전관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 ‘여자’라는 이름의 지뢰=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은 지리산 자락인 경남 산청에 거하고 있었다. 당대의 천하 제일 명기 황진이가 지리산 유람을 왔다가 남명 선생의 고명을 듣고 뵙기를 청하자, 남명은 주위에 있던 제자들에게 “천하에서 제일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제자들이 잠자코 있자, 남명 선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류관문(花柳關門)이다. 이 관문은 쇠나 돌도 다 녹여 없앤다. 너희들은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계시킨 말이었다.

# 그렇다. 자고로 남자는 여자를 피해가기 어렵다. 특히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경로로 자꾸 꼬여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 취하면 결국 녹아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쇠나 돌도 녹여내는 화류관문이니 사람 하나 녹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 ‘돈’이란 이름의 지뢰= “삼킨 돈이 자기의 목숨을 빼앗는다.” 잠언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경고다. 화류관문 못지않게 지나기 어려운 관문이 금전관문(金錢關門)이다. 박연차한테서 나온 돈은 늘 사람을 오염시키고 타락시켰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돈이 아니라 똥을 지천으로 뿌리고 다녔다. 게다가 그가 뿌린 것이 똥이건만 그것을 돈인 줄 알고 넙죽 받아먹은 자들이 숱하다. 한입 가득 똥이며 얼굴과 온몸이 똥칠로 가득하다.

# 꿈속에서 똥을 뒤집어쓰면 돈이 많이 벌린다는 속설도 없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선 오히려 돈이 똥이 되는 때가 적잖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지지 말아야 할 돈을 만지면 그것이 똥이 되는 것이다. 그 똥을 먹고 자신의 얼굴에 처바르고 온몸 전체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지난 시절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그 부인이었으며 아들이었고 활개 치며 내로라하는 얼굴들이었다니….

# ‘권력’이란 이름의 지뢰=사람을 가장 빨리, 또 확실하게 죽이는 방법이 있다. 돈 주고 여자에 빠뜨리고 권력의 감투를 씌워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권력은 돈도 만들어주고 여자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돈과 여자는 권력이 있는 곳으로 스며드는 속성이 있다. 하지만 돈과 여자 그리고 권력이 섞이면 썩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어떤 인간도 그것에 빠져 취하면 결국 썩어서 패가망신하고 만다. 겉은 화려한데 속으로부터 썩어 종국엔 망신살이 뻗치게 되는 것이다.

# 권력은 방부제가 따로 없다.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어느새 곰팡이가 피고 썩기 시작한다. 권력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기가 앉은 꽃방석에서 구더기가 들끓을 때까지, 그래서 그것이 자기 엉덩이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 지경이 될 때조차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다. 그것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권력의 추하지만 숨길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 삶도 다르지 않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실존의 자리는 썩지 않았나 들춰봐야 한다. 화류관문과 금전관문 앞에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볼 때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