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성택, 김정일 이후 킹인가,킹메이커인가 (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이 9일 제 12기 최고 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재추대하고, 1998년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을 11년만에 개정했다. 그리고 김정일 3기 체제를 정식 출범시켰다. 제12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역시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사진) 노동당 행정부장이 국방위원회 국방위원으로 처음 선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군정치를 모토로 내걸면서 2012년에 강성대국의 꿈을 꾸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이 자신 이후의 북한 권력구도 재편의 시금석을 놓고 있다는 암시를 대내외적으로 던져 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김정일 위원장이 경제발전과 체제안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한 선제포석으로 북한의 내정과 행정 그리고 정보에 달통한 장성택 행정부장에게 국방위원의 자리까지 맡게 한 것은 이제 김위원장이 장부장에게 군부통제까지 자신을 대신하여 관리담당토록 새로운 임무와 힘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는 북한 내부의 권력이동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의 3회에 걸친 기고를 통해 장성택 급부상의 의미와 인간 장성택에 대한 해부,그리고 향후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전망해본다.

1회 장성택,그는 누구인가

-열애끝에 주석의 딸과 결혼에 골인한 북한판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그녀는 퍼스트레이디를 꿈꾸나

장성택은 북한의 최고 통치자 김정일과 처남 매부간이다. 김정일의 유일한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창건자 김일성의 사위가 바로 장성택이다. 그는 1946년 강원도 천내군의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 동기생인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그래서 김일성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장성택과 김경희의 결혼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첫째, 장성택은 김경희와의 결혼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의 신분과, 북한 최고통치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수령의 딸 김경희와는 결혼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둘째, 장성택과 김경희의 결혼에 대해서 북한의 절대 통치자인 김일성 주석도 반대했다는 점이다. 김일성 주석이 장성택의 출생성분을 조사한 뒤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에는 약간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장성택은 김일성 주석의 반대로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3학년 재학 중에 이 대학을 떠나 강원도 원산경제대학(현 정준택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김주석이 자신의 딸 김경희와 장성택을 서로 떼어놓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장성택은 본의 아니게 김경희와 헤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장성택과 김경희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북한에서 신적 존재나 다름없는 수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결국 절대 권력자 수령 김일성도 이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열렬한 러브스토리는 사뭇 흥미롭다. 원래 장성택과 김경희는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학생들이었는데, 장성택은 그 반에서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서클 책임자로서 아코디언 연주가 일품이었고, 노래와 춤에도 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리에 밝고 영리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들려 왔고, 그 소문은 결국 김일성의 귀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김일성은 당장 장성택의 가족관계를 조사토록 지시했고, 조사결과 장성택의 아버지 쪽의 경력에 문제가 있다는 자료가 나왔다고 한다. 김일성은 자기 계열과는 다른 활동가들을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내면서 딸에게 당장 관계를 끊으라고 했고, 동생 김영주에게 어떻게든 두 사람의 관계를 끊어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김영주는 당시 대학 총장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는 둘이 만나지 못하게 통제해 달라는 요구를 했고, 대학 총장은 김영주의 지시를 그저 적당히 집행하는 척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쩌다 장성택을 붙잡고 있으라는 지시가 내려지면 할 수 없이 그의 누이 집으로 갔지만, 장성택이 안 들어 왔다고 하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김경희는 결국 총장실로 총장을 찾아와, 총장선생이 왜 사랑문제에 간섭하느냐고 항의했을 정도였고, 총장은 그녀가 그저 어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일로 매우 당차고 똑똑하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삼촌인 김영주를 만나 김경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김영주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김경희가 너무 성격이 독해서 오빠인 김정일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는 커녕 은밀히 자주 만난다는 걸 알게 된 김일성은 김영주에게 장성택을 김일성 종합대학교에서 출학(黜學)시켜 원산에 있는 경제대학으로 보내도록 지시를 했다고 한다.

장성택-김경희 러브스토리는 김경희의 성격이 얼마나 적극적인지, 오빠 김정일과 아버지 김일성도 딸의 성격을 이길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캐릭터를 김경희가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성공하게 된 그 배경에는 김경희 쪽에서 장성택을 무척 좋아하여 아 다닌 결과로 보여 진다. 주석인 김일성이 반대의사를 갖고 있는 결혼에 그의 딸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장성택은 감히 주석의 의중을 거스르면서까지 결혼하려는 처신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성택에 푹 빠진 김경희의 거센 성격과 강철 같은 의지에 아버지 김일성도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장성택과 김경희의 커플이 탄생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다닐 때 클래스메이트였는데 강의 시간에 앞뒤로 앉았었다고 한다. 장성택이 앞에 앉고 김경희가 뒤에 앉았었다고 한다. 장성택은 우선 잘 생겼고 무척 매력 있는 남자였으며 학교 다닐 때부터 굉장히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술도 잘 마시고 말도 재미있게 잘한 남자였다고 한다. 김경희 역시 예뻤고 약간 통통하긴 해도 눈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해서 어머니를 많이 닮았었다고 한다. 김경희는 나름대로 카리스마도 있고 상당히 여장부적인 기질을 타고 난 여자라고 한다. 이런 두 사람이 한 반에 앞뒤로 앉아 수업을 할 때면, 김경희가 강의 시간에 솔잎인가 버들가지를 들고 들어와 앞에 앉은 장성택의 귀를 간질이는 등 장난도 많이 하면서 연애를 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김경희와 장성택을 떼어 놓기 위해 장성택을 원산으로 보내면 김경희는 원산까지 장성택을 찾아가곤 했을 정도로 장성택을 좋아했다고 한다. 김경희가 워낙 장성택을 좋아해서 아버지 김일성이 집에 들어오면 장성택과 결혼하겠다고 울고불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한 남자의 마음에 끌려 결국 결혼에 성공한 김경희의 사랑은 매우 순수했던 것 같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가 진정으로 중요시하는 가치와 야망에 대한 완벽한 공유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경희와 장성택은 서로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동일한 수준의 순진함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 할 수 없는 점은 북한의 절대통치권자 김일성의 딸 김경희가 장성택과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과연 장성택이 갖고 있는 남자로서의 매력적인 점 그 한 가지 때문에만 무조건 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장성택의 무한한 정치적 가능성과 그의 타고난 외모와 능력은 결혼조건으로서 김경희에게 안중에도 없었던 요인들이었을까. 장성택이 미래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일까. 수령 김일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남자를 정치적으로 출세시켜 볼 생각은 없었던 여자가 김경희였을까.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DNA를 타고난 것이나 다름없고, 성장의 중심복판이 곧 북한 최고 권력 센터나 다름없었던 곳에서 자란 김경희에게 정치적 야망은 없었던 것일까.

북한의 권력과 파워의 내부 역학관계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각을 보면 권력의 본질은 놓치고 있고, 권력의 형식과 권력주변의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북한 파워 그룹들의 성장과 침몰을 보려고 한다. 자리와 형식에 상관없이 최고 권력자와 피를 공유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엄청난 권력이며 파워인지를 사람들은 간과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의 아들과 딸 그리고 친인척 주변에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정작 북한의 권력을 평가할 때는 자리와 형식의 나열로 파워 그룹들을 평가해 버린다. 장성택이 북한에서 최고 실세의 자리라 할 수 있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직을 거머쥐게 된 것은 단순히 그가 김일성의 사위이고 김정일의 매제였기 때문에만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뒤에는 남편을 최고 지도자로 만들어 보려고 숨어서 노력하고 있는 김경희의 큰 역할이 있다. 장성택이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그 배경에는 억척스럽기 그지없는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보이지 않은 역할이 상당히 큰 몫을 하고 있다. 이 점은 지금도 그럴 것이다. 단지 북한이 유교적인 가부장 사회인 점을 감안하여 김경희가 이를 공개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있고, 북한내부에서도 이런 일들에 대한 행위를 공표할 수 없기 때문에 장성택의 막후 서포터즈 김경희의 역할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는 북한에서 유일하게 김정일에게 감정적인 발언까지 숨기지 않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김정일의 인사개편 때 자신의 남편이 강등을 당하면 강등당한대로, 승진하면 승진한대로 자신의 호불호의 감정표시를 김정일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경희뿐이다. 이 부분은 김정일의 세 아들들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김경희를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고 한다. 김정일은 ‘경희의 말은 나의 말과 같다’고 할 정도로 친동생 김경희를 아낀다고 한다. 장성택이 막강한 권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김정일의 김경희에 대한 배려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김경희는 힘을 갖고 있다.

그녀의 곁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용순 비서였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살벌해 졌을 때, 북한 권력중심에서는 자리 이동이 단행 되었다. 국제비서로 있던 김영남이 외교부장 겸 부총리로 자리를 옮기고, 외교부장으로 있던 허담이 대남관계 부서인 통일전선부장 겸 비서로 들어 왔으며 국제비서 자리는 김용순이 부부장에서 승진하여 맡게 되었다.

당시에 김영남은 자리 이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허담의 부인도 남편을 국제비서로 승진시키지 않고 대남 사업을 맡긴데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국제부는 당내에서 조직부, 선전부 다음으로 힘이 셌으며, 이 세 부서의 부부장들에게는 주택을 중앙당 청사 안이나 다름없는 곳에 제공하고 호위국 보초가 경비를 섰으며, 승용차도 2인이 1대를 쓰는 다른 부서의 부부장과는 달리 1인 1대였다. 병원도 평양에서 시설과 의료진이 가장 좋다는 봉화병원을 이용했다. 당시 국제부에는 김경희가 과장으로 있고 김용순이 부부장으로 있었는데, 김용순이 김경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결국 김영남을 몰아내고 비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담 부인인 김정숙은 남편이 국제비서 자리를 차지하기를 늘 바라고 있었으며 당연히 김용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하지만 김경희가 김용순을 감싸고돌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 후 김용순은 김경희의 지지만 믿고 춤판 사건을 일으켜 좌천되어 1984년에 평안남도의 탄광노동자로 내려가 '혁명화'과정을 겪었다. 김용순이 철칙되고 며칠 있다가 김정일은 황장엽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와 김용순 대신 황장엽이 국제비서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황장엽은 자신이 국제비서가 되었다고 그 전말을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황장엽이 국제비서가 되어보니 김경희가 국제부 부부장으로 있었고 그녀 주변에는 신분상승이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속셈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만 보더라도 김경희는 오늘날 남편 장성택의 고속성장에 전력투구하고 있고, 장성택의 정치적 급성장의 뒤에는 억척스런 김경희의 보이지 않은 역할이 있었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김경희는 미국의 힐러리가 빌 클린턴을 만나 남편을 최고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뛰었던 것처럼 발 벗고 나섰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혹시 김정일 이후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경희는 오빠 김정일 이후의 북한을 생각할 때 당연히 그런 생각을 가질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김정남과 김정철 그리고 김정운이라는 김정일의 세 아들이 충분한 후계수업도 되지 않고 나이도 어린 상태라면 더욱 자신의 남편 장성택을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북한의 리더로 만들어 볼 꿈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김경희가 너무 일찍 이런 생각을 가진 나머지 고속 출세했던 장성택이 주변의 견제구를 맞아 시련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매제답게 결혼 하자마자 출세가도를 달렸다. 72년 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81년경에 당 청년 사업부로 자리를 옮겨 부부장, 제1부부장(85) 및 부장(89)을 거쳐 89년 6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대의원, 9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위원, 94년 7월 김일성 국가 장의위원회 위원, 95년 11월 당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에 오르기 까지 그야말로 북한에서 그의 신분은 초 수직상승이었다. 89년에는 평양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공적으로 ‘노력영웅’ 칭호도 받았다.

특히 장성택은 자신이 95년 당조직 지도부 부부장에 오르자 권력의 핵심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많이 심어 놓기도 했었다. 그가 책임지고 있는 조직 지도부는 당 간부의 인사권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권한이 막강했다. 또 사실상 북한 내에서 권력의 총본산인 사법, 검찰, 인민 보안성(공안기관) 등 그 정보에 관한 핵심 기구를 모두 장성택이 장악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성택의 가장 큰 형인 장성엽(張成燁김)은 김정일이 김일성 종합대학 4학년 재학중 후계수업을 위해 특별지도를 받을때 김정일에게 당투쟁사 부문을 가르쳤던 김정일의 개인교수였다.

그리고 둘째형 장성우가 남한으로 말하면 수도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수도방위사령관과 같이 평양 방어를 책임진 차수 (원수와 대장사이) 계급의 3군단장이자 당 중앙위 민방위부 부장이었는데, 이는 김정일 총비서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방위원회가 2002년 4월 인민군 창건 70돌(4.25)을 앞두고 장성택 제1부부장의 형인 장성우 제3군단장을 차수로 승진시킨 것이다. 김정일 총비서의 장성택 제1부부장에 대한 신임을 거듭 확인시켜 준 것이기도 했다. 셋째형 장성길도 인민군 중장으로 군단 정치위원을 지냈기 때문에 장성택은 군부와의 관계에서도 상당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매제 전영진은 주 스웨덴 북한 대사관에서 대외문화연락위 부위원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장성택은 사실상 북한의 행정, 조직, 사법,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는 물론이고 외교부 과장을 할때는 외화벌이도 많이 하여 김정일로부부터 신임을 얻었고 심지어 군까지 장악해 나갈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유학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해외 정세에도 남다른 외교적 인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장성택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라만 갔고, 그가 북한의 최고 핵심 실세라는 사실이 남한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시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바로 그 때부터였다. 장성택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고별만찬에 나와 남측 기업인들과 대화를 나눈 모습에서부터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당시 그는 남측 재계대표들과 담화를 나누기도 했었는데 특히 손길승 SK 회장이 옆자리에 앉은 장 부부장에게 “투자보장 협정 등 경협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자 장 부부장은 “위원장에게 직접 건의하라”며 손 회장을 김 위원장에게 데리고 가면서 그의 파워를 실감케 했었다.

장성택의 권력이 최정점에 이르게 된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직후부터였다. 그는 사실상 95년부터 북한의 전권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실세 권력 2인자로서 그 역할과 국가 운영을 주도해 온 측면이 보였다. 그는 김일성 종합대학교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식견이 남달라 김정일이 북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그와 깊은 숙의를 해 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2002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박남기 북측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남측 경제부총리)을 단장으로 한 18명의 북한 경제시찰단이 8박 9일 일정으로 고려항공전세기편을 이용해 서해 직항로를 통해 인천공항으로 들어 왔을 때 그 일행으로 남한을 방문했다. 김정일이 그를 북측의 대남 경제시찰단팀 속에 포함 시켜 내려 보낸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한과 해외 경제상황을 자신의 심복으로 하여금 직접 둘러보게 하여 경제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고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장성택이었기 때문이었다. 북측 대표단은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지혜와 힘을 합치면 못 해낼 일이 없다” 며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부합되게 북남관계를 더욱 진전 시키겠다”는 내용을 담은 도착 성명을 배포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남쪽 경제시찰단이 아니라 ‘고찰단’이라면서 “‘시찰’은 대충 구경하는 것이고, ‘고찰’은 생각을 하면서 진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라는 정의까지 내렸다.

이후 이들은 남한의 자본주의 경영방식에 대한 관심을 깊게 표명했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관계, 전력과 제철, 백화점의 매장운영 방식, 고속철도등 산업기반시설과 신발, 섬유, 식품가공 등 경공업 분야까지 둘러보았다. 특히 대전 대덕 연구 단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철호 김일성대 컴퓨터과학대 부학장은 대덕 연구단지 건설관련 법령집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삼성전자를 방문해서는 신의주특구와 개성공단, 금강산 특구 등에 대한 투자문제에 대한 운을 떼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 가산동 이레전자에선 “개성공단이 본격화 되면 진출할 생각이 없느냐”라고 묻기도 했고, 태광실업에서는 중국 청두에 현지 공장을 두고 있다는 설명에 “왜 중국에다 하느냐, 북쪽에다 해야 된다”고 권유하기도 했다. 대전 전자통신 연구원에서 음성 번역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선 “영어 번역은 우리 제품이 더 뛰어 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고속철도 시승 땐 시속 300km를 돌파하자 일제히 일어서서 ‘와’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를 터뜨렸다. “승차권 대신 신용카드나 휴대폰으로 결제하고 지하철을 탄다”는 설명에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북측경제시찰단은 마지막으로 제주도 한림공원에 도착하여 바닥에 꽃으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독도가 없네요. 다음에는 조그맣게 라도 꼭 집어넣어주세요”라고 지적하면서 8박 9일 동안의 남쪽 경제현장을 구석구석 누볐다.

그리고 남쪽 일정을 마친 이들이 향한 곳은 평양이 아니었다. 시찰단은 곧바로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타이,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의 역동적인 신흥 공업지대를 둘러보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당시 북한의 경제시찰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확실히 살피고 철저히 학습하겠다는 의지가 짙게 묻어 있었다. 우리 재정경제부의 한 관료는 “북한 시찰단의 규모나 인원구성, 태도 등으로 볼 때 경제개혁에 대한 북한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회에서 계속

필자 장성민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북한정치를 연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세인트존스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현대 영국과 국제문제'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미국 듀크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초대 국정상황실장과 16대 민주당 의원을 지냈다. 의원시절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활약중이다. 저서와 역서로 '전쟁과 평화: 김정일 이후, 북한 어디로 가는가'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등이 있다.


장성택 부상이후 북한을 어떻게 볼것인가

①장성택, 김정일 이후 킹인가,킹메이커인가

②장성택의 숙청과 부활

③장성택과 포스트 김정일 (3)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