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무너진 경제 되살리자…IMF합의 분노·좌절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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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통화기금 (IMF) 과의 협상이 마무리됐다.

을사보호조약 후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을 쓴 장지연 (張志淵) 선생의 통분한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나 흥분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우리가 IMF협의에 편승한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 야속하게 느끼는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반성할 점은 우리가 제때 고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해 오늘과 같은 수모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일본이 우리의 급박한 사정을 틈타 일거에 해묵은 대한 (對韓) 현안을 관철한 것은 잊지말아야 할 일이지만 분노의 화살을 미국이나 일본에 돌리는 것은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되는 일이다.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재정경제원 (재경원) 으로 대표되는 정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합의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동안 정부가 국민을 너무나 기만해 왔다.

그 점에 대해선 철저한 책임추궁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IMF와 합의한 정신 그대로 금융산업을 민간중심으로 육성한다는 실천요강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최종 합의문중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역시 금융산업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부실 종합금융사 (종금사)에 이어 시중은행의 처리마저 IMF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최소한이지만 정리가 불가피해졌다.

합의문 내용중에 외국 금융기관에 의한 인수.합병을 허용했고 1인당 주식한도를 폐지해 종목당 50%까지 늘려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내기업에 그토록 진입을 허용하지 않던 정부가 남의 손에 의해 은행의 소유지분 제한을 철폐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본란에서 수차에 걸쳐 금융개혁의 본질중의 하나가 경영주체의 확립에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으나 '경제력 집중' 이라는 벽에 부닥쳐 무산돼온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금같이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에선 한국 기업에 문호를 개방해도 외국 은행이나 기업 외에 은행을 인수할 한국 기업이 있을까. 단기채시장이 열리는 것을 포함해 이제 금융시장은 외국에 더 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활짝 열리게 됐다.

부실 종금사만 해도 그렇다.

이번에 IMF가 협상일정을 급히 앞당긴 이유중의 하나가 종금사에 대한 감독권한이 재경원에 있는데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가용외환이 거의 바닥이 났는데도 재경원은 아닌 것처럼 제스처를 써 왔다.

한마디로 재경원으로 대표되는 한국정부와 관료는 이제 국내외적으로 신인도를 상실했다.

이 시점에서 재정경제원은 국민앞에 사죄하고 스스로 조직의 축소개편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실징조가 있는 시중은행이 외국은행에 넘어가도록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한국 기업이 인수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대기업이 은행을 인수하면 '사금고화' 할 위험이 있다지만 건전성 감독을 제대로 해서 관련그룹에 편중대출되는 것을 막으면 그만이다.

부실 종금사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주인있는 회사라고 해서 경영합리화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경영의 책임주체가 분명하면 경영합리화와 사후 뒤처리가 훨씬 간명하게 이뤄질 수 있다.

합의문중에 또 중요한 부분은 우리 대기업을 겨냥해 회계기준의 투명성과 외부 감사인에 의한 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돼 회계의 투명성과 상호지급보증 축소가 포함된 점이다.

이렇게 되면 흔히 말하는 재벌형태의 선단식 경영의 근본적 개혁이 불가피해진다.

이는 금융개혁과 함께 우리 경제를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업의 경영특성이 반영 안되는 이런 급격한 개혁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기업은 군살빼기에 진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합의내용에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가 포함돼 있어 어차피 실업이 대폭 늘어나는등 고용불안은 가중될 전망이다.

정부가 나름대로 대책을 마련한다지만 기본적으로 실질임금의 하락을 유도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고용불안을 조금이라도 축소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고통은 이제부터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6.25의 폐허에서도 우리는 일어났다.

우리 경제의 규모는 그래도 세계에서 11위다.

외부의 힘에 강요되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개혁을 착실히 하면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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