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34. 톰슨경과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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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6년 2월 박정희 대통령(右)이 로버트 톰슨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고문을 접견하고 있다.

나는 1975년 12월 청와대 대변인을 마치고 문공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 시절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하는 외국의 언론인.학자.전문가들을 대통령께 소개하곤 했다.

박 대통령이 만났던 외국인 중에서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고문인 로버트 톰슨경처럼 의기투합하여 서로 활기차게 대화했던 이도 드물었다. 그는 저명한 군사전략가로 월남전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서구인으로서는 작은 키였으나 중후한 느낌을 주는 노신사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박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뒤 자기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영국의 말레이시아 고등판무관에 임명되었을 때의 얘기를 끄집어 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여러 개의 부족으로 갈라져 분열상이 극심했다고 회고하면서 자기 선임자 중 한 명이 자기에게 해준 충고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다.

톰슨경은 선임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임지에 부임하거든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일세. 긁어 모을 수 있는 권력은 모조리 긁어 모아 자네 손아귀에 집어 넣게. 그러나 그것을 행사하려들지는 말게.

긁어놓은 권력으로 고등판무관의 권위를 당당히 세워 나가게. 통치는 권력이 아니라 권위로 하는 게 더 멋진 일이야. 권력은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박 대통령은 얘기를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자기의 견해와 흡사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시골 마을의 위엄있는 촌로 얘기와 비슷하군요. 이 노인은 아침 일찍부터 단장을 짚고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동네일에 잔소리가 많아요. 어떤 때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 젊은이들이 불평을 합니다.그러면 노인은 단장으로 땅바닥을 때리면서 호령을 하죠. 이렇게 하니깐 그 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훨씬 질서가 잡히고 깨끗한 마을이 되더군요. 노인은 단장으로 대드는 젊은이를 후려치지도 않고 다만 땅을 내리치며 호통을 칠 따름이죠. 이 얘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동서(東西)가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파안대소했다. 두 사람은 권력과 권위라는 정치학의 두 기본개념에 대해 얘기를 주고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개념의 차이에 의견일치를 보고 크게 웃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권력이라 함은 정치권력, 다시 말해서 국가권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때 정치권력에는 강제력, 즉 폭력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권위는 강제력이나 폭력과는 구별된다. 권위는 일반적으로 자발적인 복종이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능력 또는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권위와 권력의 차이점은 권위에는 복종의 자발성이 있는데 반하여 권력에는 복종의 강제성이 있다는 점이다.

대화의 숨어있는 뜻을 살펴보면 톰슨경은 박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의 행사를 자제하도록 예의를 갖추어 조언했고 박 대통령은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화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정치는 정석(定石)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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