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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사람구경]8.추상미, 영화 '접속' 조연후 인기도 '접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올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접속’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음직도 하다. 주인공 한석규는 왜 영화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떠나가버린 여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 그리고 또 왜 그 옛 연인이 보내온 음반 때문에 컴퓨터통신을 통해 만나게 된,그러니까 접속된,얼굴도 모르는,이 영화의 여주인공 전도연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걸까.

지나가버렸거나 나타나지 않은 여자만 사랑하는 괴상한 남잔가 봐,한석규는. 바로 옆에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를 유혹하고 있는데도,유령같은 여자들만 생각하고 있다니. 방송국 PD는 방송작가와 사랑에 빠지면 벼락이라도 맞는단 말인가?그리고 그 여자때문에 선배와의 관계가 꼬이게 되었다고 이 불경기에,취업전쟁의 시대에,고시합격만큼이나 어렵다는 방송국 PD자리를 내팽개치고 호주로 이민가겠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얘긴가?

하기는 요즘 이민이 유행이라지?아무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젊은 남자가 그토록 매력적인 젊은 여자의 적극적인 구애 앞에 어떻게 그토록 초연할 수 있느냐는 거야. 물론 이런 푸념 섞인 의문을 제기하는 건 거의 다 남자관객들이었을 테고,구보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구보씨의 생각은 이렇다. 뭣 때문에 떠나간 여자에게 연연한담. 빨리 다른 여자나 사귀지. 좋다고 달겨드는 여자를,그것도 똑똑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왜 마다한담. 그러면서 왜 저 컴퓨터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여자와 접속을 시도한담. 이해가 안가네,이해가. 내가 보기에는,보이지 않는 옛날 여자야 보지 못했으니 알 바 아니고,컴퓨터 저 너머에 있는 여자보다 방송국 안에 같이 있는 여자가 더 나아 보이는데. 쯧쯧.

드디어 구보씨의 본색이 드러나고 만다. 구보씨는 영화 속에 나타나지도 않는 여자는 물론이고,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보다, 조연을 맡았던 여배우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별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냥 그랬다. 그녀가 더 매력적이라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도 굳이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글쎄,그게 구보씨의 취향이라고나 할까.

각설하고, 좀더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구보씨는 그 '접속'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매력적인 배우를 발견한 것이다.

구보씨도 대학시절 한때 연극합네 하고 돌아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연기라는 게 어떤 건지, 배우란 무엇인지, 좀 안다면 안다.

방송작가 홍은희로 나와서 한석규에게 찬밥 취급을 당하는 그 여배우에게서 구보씨는 희한한 매력을 느낀 것이다.구보씨는 대학시절 읽었던 어느 연극개론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하찮은 역이란 없다.

하찮은 배우가 있을 뿐이다.

타고난 배우는 무대의 맨 구석에 서있어도 관객들의 눈에 뜨이고야 마는 것이다.

뭐 대충 그런 말이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구보씨는 바로 '접속' 의 조연여배우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거였다.

그런 예감이 오면 구보씨는 곧장 수사에, 아니 뒷조사에 착수한다.

영장을 발급받을 수 없으므로 대체로 몰래 한다.

수사에 착수한지 무려 두달여 만에 드디어 구보씨는 확실한 단서를 잡았다.

물론 그 두 달 여 동안 부지런히 그녀의 뒤를 미행하고 돌아다녔다는 말은 아니고, 차일피일하며 꼼짝않고 있다가, 두 달 여 만에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 한발짝을 내디뎠을 뿐인데, 그녀의 꼬리가 구보씨의 지저분한 구두 밑창에 물컹하는 촉감으로 밟혔던 것이었다.

다시 각설하고, 구보씨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녀는 성은 추요 이름은 상미, 알파벳 약자로는 SM, 알고보니 연전에 보았던 영화 '꽃잎' 에도 잃어버린 소녀를 찾아다니는 대학생들 중에 하나로 출연한 바 있었으나 구보씨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고, 황지우라는 시인의 시를 극화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라는 작품을 비롯하여 수편의 연극에 출연했던 촉망받는 신인이었던 것이다.

집요한 비밀수사과정에서 구보씨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녀가 글쎄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쯤에 카프카 원작의 '빨간 피터의 고백' 을 공연하여 이미 한국연극의 전설 속의 주인공이 된 고 (故) 추송웅씨의 직계혈통, 그러니까 친딸이라는 사실이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내 예감을 속일 수는 없다니까. 그런데 이걸 어쩐다.

너무나 민감하고 충격적인 사실이라 도저히 밝힐 수가 없겠는 걸.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지. 구보씨는 그렇게 굳게 다짐하고는 입을 꼭꼭 다물려고 했으나, 그 엄청난 비밀을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아주 친한 친구 세명에게만 아주 은밀하게 털어놓았는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 놀라운 고백을 듣고도 놀라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구보씨는 그녀를 만났다.

단지 만나고 싶었으므로. 구보 : 당신의 과거는 이미 샅샅이 뒷조사해서 다 알고 있으니 당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만 묻겠다.

사람 : 나조차 모르는 과거가 많은데. 현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차라리 과거에 대해 물어봐 달라. 구보 : 그러면 가려진 과거에 대해 묻겠다.

사람 : 가려진 과거라니?

구보 : 왜 배우가 되었나?

사람 : 아버지도 배우였고 어머니도 배우였다.

삼남매 중 큰 오빠만 어릴적부터 꿈이 과학자였고 지금은 컴퓨터를 다루는 회사원인데, 그게 우리집에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배우가 안되었으면 이상했을 것이다.

구보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람 : 서너살 때부터 쫓아다녔다.

분장실에서 놀던 기억, 8살 때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섰던 기억,빨간 피터를 공연하실 때는 객석에 내 전용좌석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지방공연때는 학교를 빼먹고 따라갔을 정도였다.

나는 지하실에서 나는 곰팡내가 좋다.

그건 아마 내 원체험의 공간이 곰팡내나던 지하소극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냄새가 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냄새 때문에 연극이 고향같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구보 : 연극을 계속할 건가?

사람 : 물론.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빨간 피터를 내가 공연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나의 주업이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 드라마도 하고 있고, 라디오의 DJ도 하고 있지만, 정말 하고 싶은 건 영화다.

구보 : '꽃잎' 과 '접속' 을 봤다.

만족하는가?

사람 : '꽃잎' 은 소녀역 오디션을 보러갔다가 대학생역을 맡게 되었는데, 별 재미 없었다.

장선우감독과 한 번 일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소녀를 찾아다니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구보 : '접속' 은?

사람 : 불문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별 이유없이 프랑스영화를 많이 봤고, 좋아하는 편이다.

'접속' 은 프랑스영화처럼 사소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미덕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고 해서 좋아한다.

구보 : 같은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 : 장점이 단점이기도 하니까. 구보 : 표절시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 : 일본영화를 보지 못했으므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장윤현감독을 믿는다.

구보 : 다음 영화는?

사람 : '퇴마록' 이다.

구보 : 원작은 읽어보았나?

사람 : 안 읽을 생각이다.

원작을 읽어야 하는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초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할 때는 원작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구보 : '퇴마록' 을 무시하는 건가?

사람 : 그런 건 아니다.

이 작품의 경우, 시나리오와 원작의 구성이 별개의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구보 : 어떤 역인가?

사람 : 네 명의 퇴마사 중 유일한 여자인 승희 역이다.

사이비종교의 광신적인 집단자살사건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임신부가 낳은 아이가 바로 승희다.

저주받은 기구한 운명, 그런 거다.

안성기씨가 신부퇴마사로 신현준씨가 기공퇴마사로 공연한다.

둘 중 당연히 신현준씨와의 사랑이야기가 있을 거고. 구보 : 시나리오는 마음에 드는가?

사람 : 어릴 적부터 신비한 이야기, 특히 사후의 이야기 같은데 흥미가 많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죽은 다음의 세계가 궁금해서 수면제를 먹고 사흘 동안 잠들었던 적도 있었다.

구보 :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언젠가?

사람 :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구보 : 두 사건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람 :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주인석 <소설가>

<추상미 약력>

72년 서울생. 홍익대 불문학과 졸업.

여덟살 때 아버지와 함께 '도적들의 무도회' 라는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으나 그건 그냥 어릴적 추억같은 것이고, 홍익대 불문학과 재학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하여 94년 '로리타' 라는 작품으로 데뷔. 이후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바람분다, 문열어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작품에 출연. 백상예술대상 연극신인상을 받기도 함. 영화는 95년 '꽃잎' 에 출연했고, 올해 '접속' 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받지는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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