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은 신화와 환상을 먹고 자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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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22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왕정의 역사다. 그러나 지난 200년 동안 200여 개의 왕정 중 44개만 살아남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왕정은 무참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왕정에 대한 도전이 가장 일찍 제기된 곳은 영국이다. 왕과 의회가 벌인 권력투쟁으로 1689년 제한된 입헌군주제가 확립됐다. 영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군주제의 절묘한 결합을 성취했다.

군주제의 미래

영국은 왕정의 미래를 예단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왕실의 우두머리다. 그는 16개 국가의 국가원수다. 영국 왕실이 사라지면 왕정의 수는 28개로 준다. 언젠가는 왕정을 폐지한 영국에서 대통령을 뽑는 날도 상상할 수 있다.

영국 왕실의 운명에 대해선 현상유지론·폐지론·개혁론이 있다. 정부는 개혁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고든 브라운 총리는 엘리자베스 2세와 왕위 계승 방식의 수정을 논의했다. 영국 왕실의 위풍당당함을 뽐낸 주요 20개국(G20) 행사의 화려함 뒤에는 여왕의 고민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수정이 필요하다. 1701년 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본인이나 배우자가 가톨릭 신자인 경우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없다. ‘장자 상속 우선 원칙(primogeniture)’도 문제다. 먼저 태어나도 공주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다. 영국 좌파는 이를 타깃으로 삼고 있다. 스웨덴 왕실은 장자 상속 우선 원칙을 1980년 폐지했다. 네덜란드(83년)·노르웨이(90년)·벨기에(91년)에서도 사라졌다.

영국 국민은 변화를 바라고 있다. 지난달 27일 BBC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9%가 왕위 계승에서 ‘남녀가 동등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81%는 ‘왕위 계승자가 가톨릭 신자와 결혼해도 된다’고 답했다. 76%가 군주제 유지를 희망했지만 18%는 영국이 공화국이 되기를 바랐다(6%는 모른다고 답했다).

종교나 성(性)에 따른 왕위 계승의 차별은 시대착오적이다. 유럽연합의 인권 기준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영국 왕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원칙을 개혁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다. 개혁 과정에서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요구할 수 있고, 호주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 공화정 채택론이 강해질 수 있다.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는 지난달 29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호주는 결국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와 정치의 연결 고리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영국 국왕은 영국교회(성공회)의 수장이다. 가톨릭 신자 국왕이 즉위한다면 국가-교회의 관계는 전면 수정이 필요하다. 문제가 복잡하다 보니 “서둘 것 없으니 22세기까지 묻어 두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왕정을 옹호하는 사람에게 영국 왕실은 곧 역사요 전통이요 문화다. 이들에게 왕실은 영국을 영국답게 하는 국가 정체성의 원천이다. 모든 나라의 문화를 비슷하게 만드는 세계화에 대응하는 보호막이 바로 왕실인 것이다. 이들은 또한 왕실이 정치적 중립을 바탕으로 국가 통합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조금 궁색한 옹호론도 있다. 왕실 유지가 관광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폐지론자는 대꾸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왕실이 없어도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왕족들의 스캔들이 잇따른 데 대한 냉소도 있다. “왕실이 사라지면 가십거리가 없어져 인생의 재미 하나가 없어지기 때문에 왕실 폐지는 곤란하다.”

왕정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인간에겐 왕국의 영화(榮華)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월터 배젓(1826~1877)은 이렇게 말했다. “군주제를 강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구나 군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젓은 또 “왕정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왕실에 대한 신화와 환상이 필요하다”고 봤다. 휴대전화로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곧바로 올릴 수 있는 디지털 시대는 왕실의 신화를 깨기도 하며 새롭게 재생산하기도 한다. 유럽에선 왕실끼리 결혼하는 게 아니라 평민과 결혼하는 게 대세로 자리 잡았다. ‘신데렐라 탄생’이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다.

유구한 정치철학의 전통도 군주제에 힘을 실어준다. 민주공화정은 본질적으로 ‘다수에 의한 독재’로 흐를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과두제·군주제가 각기 문제가 있다고 봤다. 그는 세 가지 정치체제가 융합된 혼합정부(mixed government)를 대안으로 내놨다. 이처럼 정치철학의 두 거목은 군주제의 유용성을 설파했다. 대통령중심제는 혼합정부의 성격이 강하다. 대통령은 사실상 ‘선출된 군주’라는 시각도 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한스헤르만 호페는 “민주정과 왕정에 모두 문제가 있지만 왕정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공룡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이유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공룡이 소멸한 게 아니라 다른 동물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 정치사의 공룡으로 군림하던 왕정도 사실은 대통령제로 진화했다고 보는 유추가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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