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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로켓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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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33면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유명한 불경 구절이 있다. 로켓이 바로 그런 사례다. 같은 로켓 추진체라도 폭탄을 실어 날리면 군사 무기인 미사일이 되지만, 인공위성을 실어 쏘면 상업용 우주 발사체가 된다.

로켓은 처음부터 전쟁 도구로 개발됐다. 그 계기는 1943년 2월에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나치 정권은 군수산업을 총가동해도 소련을 점령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기체계와 병력으로는 적과 경쟁해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그 대책으로 비대칭 전략을 마련했다.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 적이 가지지 못한 비밀무기를 개발해 필살의 일격을 가한다는 전략이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력이 뒤처져 재래식 무기체계로는 따라오지 못하니까 미사일과 핵을 비롯한 비(非)재래식 무기체계에 눈을 돌린 것이다.

당시 독일 과학자들은 발트해 연안 페레뮌데의 과학기술 연구센터에 불려갔다. 군에 소집돼 장교 당번병으로 일하던 물리학자, 군용 제빵공장에서 빵을 굽던 수학자, 수송 트럭을 몰던 정밀기계 공학자들이 다시 연구개발 업무에 복귀했다. 이들은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등의 지휘 아래 V1·V2를 비롯한 유도미사일을 개발했다. 미사일이 영국을 향해 발사됐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5년 2월까지 미사일을 제조해 발사하던 페레뮌데의 기술자들은 소련군이 진격해 옴에 따라 관련 장비와 시설을 뜯어 그해 3월 중순까지 오스트리아 등지로 옮겼다. 그해 5월 페레뮌데를 점령한 소련군은 거의 폐허로 변한 시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 터에는 92년 역사기술정보센터가 들어서 일반인의 견학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 산업문화유산의 길(European Route of Industrial Heritage[ERIH])’에도 등재돼 ‘에너지·교통수단·통신 분야’의 산업 역사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곳에서 개발된 V2 로켓과 무인 폭격기는 인기 전시품이다.

페레뮌데의 연구원 중 대부분은 전후 미국에서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얻었다. 연구원 명부를 입수한 미군이 ‘페이퍼클립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찾아내 미국으로 데려가는 작업을 진행했다. 군사기술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으로 얻은 정보의 가치를 돈으로 따지면 당시 환율로 100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다.

그렇게 데려간 인원은 가족을 포함해 1600여 명에 이르렀다. 처음 1년 계약으로 건너간 독일 과학자들은 괜찮은 보수와 대접 앞에 대부분 미국에 귀화해 정착했다. ‘독일 로켓의 아버지’라는 폰 브라운 박사와 동료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전쟁부의 특별 고용자’로 불린 이들은 미국의 대륙간탄도탄 개발과 우주 탐사 계획에도 관여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창설에도 앞장섰다. 그들은 새로운 조국에 헌신했다.
북한이 로켓을 무기로 다시 목청을 높이고 있다. 거기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잠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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