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내 생각은…

전력산업 경쟁 도입 무산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지난 17일 산업자원부는 배전분할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던 산자부의 정책적 일관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전력산업에 대한 경쟁 도입은 지난 국민의정부에서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된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당시 법안 설명자료에는 발전분할뿐 아니라 배전분할에 대한 계획, 그리고 2010년까지의 전력산업 소매 자유화에 대한 일정도 제시돼 있었다.

산자부의 이번 발표는 노사정 공동연구단의 연구결과를 검토한 노사정 공공특위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산자부에서 추천해 공동연구단에 포함되었던 전문가들은 연구결과가 아무런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별도의 보고서를 제시했다. 결국 산자부는 자신이 추천한 전문가의 의견은 무시하고 노조 측 추천인사가 중심이 돼 이끌어낸 결론에 따른 셈이다.

산자부가 자신이 추진한 정책을 관철하지 못하고 노사정 의견에 따라야만 했던 것은 '대화와 타협'이 참여정부의 중요한 국정원리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만이 중요한 가치인가. 참여정부의 국정원리에 포함된 '원칙과 신뢰'는 공허한 구호인가. 정부가 천명하고 국회 동의를 받은 전력산업의 경쟁 도입을 기정사실로 하여 여러 기업이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어떤 기업은 이미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이제 배전분할이 중단되면 우리나라는 한전 혼자 전력을 도매로 사고, 소매로 파는 기형적 산업구조로 남게 된다. 게다가 발전회사는 모두 한전의 자회사다. 이렇게 할 바에야 무엇하러 구조개편하고 경쟁을 도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지난해 노사정 공동연구단을 구성해 배전분할에 대한 검토를 위임할 때 이미 그 싹이 자라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의 연구와 국회에서의 합의를 이끌어낸 정책을 노사정에서 다시 재검토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어리둥절했다. 본래 전력산업에서의 경쟁 도입은 노사정에서 논의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전력산업의 변화는 인위적 산업구조 조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전력산업의 운영기술이 변화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추세다.

처음 전력산업이 태동했을 때는 수요처 주변에서 전력을 생산하여 바로 수요처에 보내는 방식이 주종이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전력사업체가 수요처 주변에 우후죽순격으로 조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20세기 초에 수십개의 전력사업체가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류가 발명되고 고압송전 기술이 개발되면서 전 세계 전력사업체에 '규모의 경제'효과가 나타나게 되었고 기업 인수.합병(M&A) 바람이 불게 된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보기술(IT)의 발전으로 전력을 도매시장에서 경쟁적으로 구입하고 판매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했다. 그래서 전 세계는 전력을 경쟁적으로 거래하는 전력거래 시스템이 자리잡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60여개국이 경쟁적으로 전력을 사고파는 전력거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계통운영 시스템을 확보하기 위해 한전을 발전과 배전으로 분리하고 이들을 다시 몇개의 회사로 분할, 전력거래소에서 경쟁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술적 변화는 이에 따른 산업조직의 변화를 반드시 불러일으키게 된다. 지금 안 해도 어차피 기술적 변화로 배전분할은 조만간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계적인 조류다. 휴대전화의 확산을 막을 수 없듯 발전과 배전의 분할을 통한 전력거래 방식은 불가피한 기술의 흐름이다.

노동계의 투쟁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일단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같이 정책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정부 탓이다. 한순간을 모면하는 것보다는 긴 역사의 흐름에서 할 일을 해나가는 것이 정부의 바른 역할이다.

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