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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북한의 ‘막장 외교’와 철학의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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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로마 제정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남긴 명언이다. 남북한 관계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해 나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주민들이 굶주리고 정치적 자유가 박탈된 북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인권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핵실험까지 한 북한 지도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하겠다고 한다. 가장 강력한 두 종류의 대량살상무기(WMD)를 확보한 국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무기의 개발과 축적은 투명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 무기로서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하다. 실험이 필수적이냐 아니냐는 논쟁도 무의미하다. 북한 지도자는 실험을 통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해 왔음을 세계에 과시하고 싶을 뿐이다. 북한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은 더 이상 은밀한 사업이 아니다. 공개리에 착착 진행하고 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쟁기를 만들겠다고 6자회담에 참가하면서 놀라운 용기로 핵무기와 운반 수단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북한처럼 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체계적인 국제 질서, 규범적인 국제 약속, 그리고 물리적 또는 암묵적인 국제 압력이 첫째 이유다. 욕구의 충족이 가져올 파괴적 미래에 대한 합리적 판단 때문에 욕구를 자제하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도덕률이다. 한 사회의 동시대인들이 전원은 아니더라도 다수가 준수하는 관습이나 약속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신사다운 행동이다. 그런 사람이 점잖고 품격 있는 사람이다. 보통의 신사라면 보편적이진 않아도 대체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집단선’(collective good)을 위해 수용한다. 남들은 규범을 준수해 집단선에 기여하고 있는데 자신은 집단선의 열매를 따먹으면서 규범을 거부하는 것은 신사다운 행동이 아니다. 자신은 공장 폐수를 방출하면서 남들의 비용과 희생으로 만든 맑은 물을 즐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막장 외교’를 하고 있다. 지금의 국제사회에서는 다자적 합의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WMD를 개발·제조할 수가 없다. WMD를 규제하려는 일부 국가의 압력이 너무 강해 이 규범을 거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국이나 가상 또는 현실의 적국과 동종의 무기 경쟁에 빠져들게 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심에서 비롯된 상호주의 정신에 따라 개발·제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북한보다 재정적·기술적 능력이 모자라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보다 북한 지도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 지도자는 이단적 생존 전략을 취하고 있다. 보편적 안보 개념을 유린하고 있다. 안보를 위한다면서 몰래 만든 칼을 너무 광폭하게 내놓고 휘두르고 있다. 안보를 교환하고 판매하고 사려는 전략이 오히려 북한의 안보를 앗아감으로써 더욱 깊은 상처를 안고, 되돌릴 수 없는 시련에 시달리게 될지 모른다. 북한 지도자는 ‘철학의 빈곤’의 후과를 두려워하며 진정한 민족애가 무엇인지 깊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한다. 북한 지도자는 한국과 미국 지도자에 대해 ‘외교의 빈곤’이라며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수혁 연세대 특임교수·정치외교학 전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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