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정치가 경제를 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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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역협회 황두연 (黃斗淵) 부회장이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마이클 브라운 회장을 만났다.

마이클 브라운은 시카고 제1은행 수석부사장이면서 11년간 도쿄 (東京).서울.시드니 금융가 현장에서 산 아시아 경제통이다.

"당신 보기엔 한국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근본원인은 한국 기업의 투명성 (transparency) 부재에 있다.

" "기업이 투명하지 않다니? 우리도 회계법에 따른 재무제표가 있고 정기적으로 이를 공포하고 있는데…. " "미국이나 한국이나 회계 시스템은 비슷하다.

문제는 사실 (fact) 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기재하지 않는데 있다.

재무제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경영분석이 되질 않는데 문제가 있다.

" "미국의 경우 부도예방은 어떻게 하나?" "미국은 기업이 부실화되고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자금을 대출해준 은행이 기업의 각종 회계관련 서류를 면밀히 분석해 대처방안을 제시한다.

기업도 미리 은행과 협의해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한국 기업은 그렇질 않다.

은행에 위기상황을 알리려고도 하지 않고 손실과 부실이 우려돼 은행이 이를 지적해도 있는 사실마저 숨기고 덮어버리려 한다.

미국이나 한국이 시장경제하의 비슷한 회계원칙을 갖고 있다 하나 정직하게 원칙과 질서를 지키는 관행 (discipline) 이 서있지 않다.

구조적 문제다.

단기간에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외국인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 이 대화에서 우리는 세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투명성' '사실' '원칙과 질서의 관행' 이다.

이는 비단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정치.사회 전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의 정체가 여기에 있다고 보기에 나는 이 세가지 용어를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투명성이란 사업을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게 하라는 주문은 아닐 것이다.

예측 가능한 만큼은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저히 가망 없는 사업에 5조원의 은행빚을 얻어 나라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한보사태야말로 불투명의 극치다.

언필칭 국민기업이라는 기아자동차가 또 몇조원의 은행빚을 얻고 도산지경에 이르렀지만 어느 누구도 경영 부실의 책임을 지지 않았고 몇달을 끈후 공기업이라는 어정쩡한 상태로 끝나버렸다.

누가 이를 보고 한국 경제의 투명성과 가측성을 말할 것인가.

정치 지도자 모두가 말한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정치가 경제를 살려? 정치 너부터 정신차려! 이게 여론이다.

정치야말로 불투명 자체다.

정치의 투명성과 가측성을 흐리는 최대 장애가 정치자금이다.

수조원에 달할 정치자금 염출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全.盧대통령 시절의 수금방식에서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그 악폐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폭로가 있었지만 검찰은 수사 착수 하루만에 손을 떼버렸다.

수십억.수백억원이 든다는 창당.지구당 작업을 한 후보는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래서 청와대 뒷돈 설이 돌고 온갖 억측이 꼬리를 물지만 성금과 외상으로 했다는 답변만 되풀이할 뿐이다.

수천억원대의 정치자금 입.출금이 안개속이고 창당과정의 재무제표가 불분명한데도 정치 지도자가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가.

원칙과 질서의 준수 관행은 어떤가.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고 진보적 성향의 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정치가가 어느날 개발독재와 손잡고 내각제 연대를 내세웠다.

그런데도 최다 여론 지지를 받고 있다.

10여차례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되뇌던 젊은 후보가 탈당해 새 당을 만들었지만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쩐 일인가.

국민 스스로 정치의 불투명과 혼탁을 조장하고 정직하지 않은 정치가에게 박수를 보내며 원칙과 질서의 파괴자를 고무.찬양하는 꼴 아닌가.

국민 수준이 정치수준이고 정치가 이 꼴이니 경제가 거덜난다는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는 영원히 끊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이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직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질서 관행을 조성하기 위해 이번 선거는 국민의 투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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