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신속처리권 법안 무산 미국인 보호무역 색채 드러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무역협상 신속처리권 법안이 최근 의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이에 대한 하원표결이 무산됐다.

이 일은 자유무역에 대한 상당수 미국인들의 시각이 얼마나 회의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신속처리권 법안은 아시아.남미에 대한 시장개방압력을 강화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클린턴은 국제적 주도권 장악뿐 아니라 미국의 지속적 변영을 위해서도 이 법안이 부득이하다는 점을 의회와 일반국민에게 호소했다.

클린턴행정부는 미국경제의 경쟁력 강화로 교역협상에서 전례없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자신해 왔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무역법안을 서두르지 않으면 타국시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을 놓칠지 모른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 왔다.

이처럼 신속처리권 법안과 미국의 장기적 번영가능성을 연결지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클린턴은 의회내 회의론자들, 특히 민주당 인사들에게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이 미국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상당수 미국인들은 NAFTA하면 으레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미국기업들을 연상한다.

백악관이 NAFTA를 너무 팔고 다니는게 아니냐는 비아냥도 많다.

자유무역이 오히려 이롭지 못하다는 인식은 미국내에 예상보다 널리 퍼져있다.

최근 신속처리권 법안 공방에 즈음해 나온 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유권자 가운데 60%는 미국시장이 외국제품에 너무 개방적이라고 응답했다.

51%는 자유무역협정이 근로자계층의 희생아래 다국적기업을 살찌운다고 답했고, 50%는 미국기업의 해외이전을 촉진시킨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부가 보호주의보다는 개방에 근거한 무역정책을 펴야한다는 쪽이 67%나 되면서도 현재의 무역정책이 성장을 촉진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37%만 "그렇다" 고 했고 41%는 "아니다" 였다.

미국정부는 자유무역을 통해 미제상품에 최대한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입장에 따라 무역규범을 어기는 교역국들에게 매우 공격적인 강제력을 발휘해 왔다.

지난해 미국무역대표부 (USTR) 안에 무역협정이행점검반 (MEU) 이라는 상설조직까지 만들어져 주요교역국의 무역관행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속처리권 법안이 연기된 것처럼 교역확대를 위한 클린턴 행정부의 당초 의제들은 제대로 진전되지 않고 있다.

의회 구성원의 3분의 2 가량이 90년 이후 선출됐고 상당수가 1, 2년차로 채워져 있어 과감한 판단을 주저하고 있다.

미국민의 절반이 자유무역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는한, 그리고 이들의 표를 의식한 의회가 주춤거리는한 클린턴의 급진적 개방정책은 쉽사리 결말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김석한<변호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