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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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새벽에 혼자 눈을 떴을 때가 걱정되는군. 혹시라도 딴 생각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창백해 보이는 정마담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하지 마. 삶에 대한 근성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강해. " "경험인가?" "아니 상식이야. 근데,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예삿일이 아닌데 자기 집도 안 보여주고 날 그냥 돌려 보낼거야?"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지금이 예의를 차릴 만한 정황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힘들었을텐데 들어와서 뭣 좀 마시고 가.

하다못해 시원한 물이라도 말야. " "냉장된 맥주 있으면 줘. 어릴 때 젖먹던 힘까지 다 쓰고 났더니 갈증이 나 미치겠어. " 나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그녀는 밭은 기침을 두어 번 뱉았다.

그리고는 혼자 사는 남자의 공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곧장 소파로 걸어가 던지듯 몸을 묻었다.

"누구는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오질 않았는데, 누구는 들어오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굳이 들어오겠다고 하니 정말 어이가 없군. " 냉장고에 들어 있던 캔맥주 두 개를 들고 소파로 가 그녀와 마주되게 앉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물론 낮에 다녀간 하영을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다.

"누구 말하는 거야. " 원 터치 캔의 마개를 열며 다소 몽롱한 눈빛으로 정마담은 나를 건너다 보았다.

"낮에 어떤 여자가 이 붓꽃 화분을 사 가지고 왔어. 그런데 그 여자가 아무런 이성적 감정을 품지 말고 자신을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게 했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하영이가 나타난 거야. 문제는 포옹이 아니었는데도 결국은 그것이 심각한 문제로 비약했어. 내가 감정을 속이지 못한 거야. 그러니 하영이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겠어?

. "이런 날도둑 같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나도 놀라고 있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평상시라면 아무일도 아닌 것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문제들이 아주 기막힌 형국으로 꼬여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거… 이런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웃기지마. 그 이전에 이미 이본오의 마음 속에서는 자기 암시 같은 게 일어나고 있었어. 남자놈들이 도둑놈 심보를 지녔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 자기 암시의 양면성을 꼬집는 거야. 붓꽃을 사온 여자, 어젯밤에 함께 술 마시러 왔던 그 피디지?" 이 도둑놈아 그래도 오리발을 내밀래?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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