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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비자 몇십원 차이도 민감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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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올 1월이었다. 7년째 거래해 오던 전화기 업체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판매량이 줄어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됐다.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하겠다”는 얘기였다. 평소 성실하게 직원들을 관리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분이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어려움을 겪는 거래처는 이곳뿐일까. 경기 불황의 그림자는 과연 어디까지 드리워져 있을까.

불황 속에서 알뜰 상품에 손님이 몰린다. 28일 서울 문정동 GS마트 송파점에서 고객들이 증정 행사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GS리테일 제공]


동료 MD(상품 기획자)들의 눈을 통해 실물 경제의 흐름을 살펴봤다. 우리가 일하는 GS리테일에는 129명의 MD가 일하고 있다. MD는 주로 유통업체에서 볼 수 있는 직종이다. 시장과 산지, 소비자 정보 등을 분석해 잘 팔릴 상품을 기획하고 구입하는 일을 한다. 생산과 소비 시장을 동시에 들여다봐야 하는 직업 특성상 경제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고환율·경기 불황에 우는 생산자=의류 담당 최성철 MD는 “패션업체 대부분이 중국·베트남에 공장을 두고 있어 생산원가가 크게 올랐다. 신제품 판매율은 지난해의 절반도 되지 않아 ‘부도나게 생겼다’고 발을 구르는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라며 한숨을 쉰다.

농촌과 어촌을 찾는 MD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야채 담당 이성주 MD는 “기름값·비료·비닐 등 시설 재배 농작물의 생산원가가 올라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다”고 했다. 수산물 담당인 박준석 MD는 “고등어·삼치·갈치 등 국산 수산물 어획량이 줄면서 어부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있다. 고기는 안 잡히는데 면세유는 비싸 바다에 나가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한다”고 전했다.

◆저가 상품만 찾는 소비자=이런 가운데 호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소비자들 역시 저가 상품만 찾는다는 게 요즘 유통업체 MD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조금이라도 더 품질 좋고 싼 물건을 찾기 위해선 분주히 뛰는 수밖에 없다. 산지와 거래처를 누비느라 같은 팀 MD들도 일주일에 얼굴 한 번 볼까 말까다. 수산팀 MD들이 특히 바쁘다. 당번을 정해 매일 자정~새벽 2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을 다녀오고,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지방 산지에서 보낸다. 박준석 MD는 부산·속초·포항·군산 등지로 하도 출장을 다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요즘처럼 대형 마트마다 ‘파격할인’을 내걸 때는 싼 제품을 얼마나 잘 사느냐에 MD의 성패가 달려 있다. 소비자들이 가격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매출만 봐도 알 수 있다. 가격 할인이나 증정품이 없는 상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유통업체의 브랜드로 팔리는 PB(자체상표) 제품들은 싼 가격 때문에 매출이 부쩍 늘었다. PB 담당인 윤태현 MD에 따르면 특히 우유·생수·화장지 같은 생필품 품목에서 PB 제품 매출이 지난해보다 50% 이상 올랐다고 한다. 대형 마트 간의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가격 조사도 필수적이다. 인근 경쟁점보다 공산품 가격이 몇십원만 비싸도 고객 항의가 들어온다.

◆대책은=우리 MD들 가운데는 환율 안정을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 꼽는 이가 많다. 한 과일 MD는 바나나를 수입하는 업체 얘기를 들려줬다. 주문한 시점의 환율로 대금을 마련해 놨는데 바나나가 선박으로 운송되는 두 달 사이에 환율이 크게 올라 수억원대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우수한 중소기업이 단기적인 금융 경색으로 넘어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유영희 인테리어 MD는 “당장 어려움에 처한 수입업체가 많은데, 정부에서 단기 자금을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위기를 이겨내고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취재=윤성훈·박준석·방준석 MD
작성=방준석 MD

MD가 권하는 알뜰 쇼핑법

진열장 끝에 놓인 상품 할인폭 커
과일·채소는 저녁시간 뒤 더 싸요

◆축산물(김진배 MD)=제육볶음이나 구이용으로 돼지고기를 살 때는 삼겹살·목살 이외 부위를 추천한다. 우리나라는 삼겹살 선호도가 높아 가격이 많이 비싼 편이다. 하지만 앞다리살이나 뒷다리살은 담백하고 쫄깃한 맛을 느낄 수 있어 구이용으로 제격이다. 삼겹살이나 목살에 비해 20~30% 저렴하다.

◆농산물(이성주 MD)=최근 수입·국산 과일 가격이 모두 올랐다. 이럴 땐 무조건 전단지로 세일 행사를 광고한 상품을 고른다. 전단 행사용 과일은 보통 20~40% 싸게 판다. 금·토요일에 쇼핑 계획이 있다면 저녁을 먹은 다음 쇼핑에 나선다. 재고를 떨어내기 위해 오후 9시부터 과일·야채를 할인 판매한다.

◆가공식품(김창학 MD)=진열장 끝에 있는 상품에 주목한다. 대형마트 진열장에서 가장 주목도가 높은 곳은 고객의 동선과 맞닿은 진열장의 끝부분이다. 과자·통조림·조미료 등 가공식품의 경우 할인 폭이 큰 상품을 주로 이곳에 놓는다. 증정품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생필품(유영희 MD)=제품에 표시된 단위 가격을 꼼꼼하게 체크한다. 화장지는 m당 가격이, 기저귀는 개당 가격이 표시돼 있다. 판매 가격이 똑같아도 양에 따라 실제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단위 가격이 저렴한 상품이 진짜 싼 것이다. 화장지에 키친타월, 고추장에 된장 식으로 다른 종류의 증정품이 붙어 있는 게 더 실속 있다.

취재해 보니 …
“활기찬 현장서 희망 봤습니다”

취재에 나선 MD들. 왼쪽부터 윤성훈(유제품)·박준석(수산)·방준석(가전) MD.


이번 취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각자 자신이 담당한 분야만 특별히 어렵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전해 온 ‘실시간 속보’는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희망은 있었다. 생산·판매 현장에 살아 있는 생기가 그 증거다. 산지의 농민들은 제값을 받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도매시장은 경매하는 이들의 목청으로 떠들썩하다. 대형 마트도 싼 물건을 찾는 고객들로 북적인다.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통 현장에도 어서 따뜻한 봄이 오길 손꼽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