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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도 환경에도 좋게, 화장품의 이유 있는 진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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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20면

‘황금·유향·몰약’.
예수가 태어날 때 동방박사 3인이 예물로 가져와 바친 물건 세 가지다. 황금을 뺀 나머지 두 가지가 화장품에 속하는 물질이다. 유향은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자라는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진액이다. 고대 중동 지역에서 제사 의식 때 널리 사용됐지만 테레빈유와 섞어 피부에 발라 땀 나는 것을 억제하는 피부 화장품으로 널리 쓰였다. 인도·아라비아·소말리아 등지의 몰약나무에서 나오는 몰약도 주된 용도가 진통·방부제와 화장품이었다. 구약성서 에스더서의 주역인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기 전 여섯 달 동안 몰약으로 몸을 정결케 했다고 한다. 화장품은 성경시대부터 이미 부와 건강·고귀함의 상징으로 통했던 것이다.

화장 본색

문명과 뗄 수 없고, 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화장품이다. 역사가 시작된 7000년 전부터 인류는 몸을 아름답게 하는 데 열성을 쏟아 왔다. 세월이 흐르며 성직자와 귀족의 전유물에서 생활필수품으로 입지도 바뀌었다. 2007년 전 세계 화장품 산업 규모는 1515억 달러(약 202조원)에 이른다. 의식주를 제외한 상품으론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다.

이런 화장품이 최근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마무리 단계에 다다른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이다. 8차 협상을 마친 양측은 24일 컬러TV 등 한국이 수출하는 공산품에 대한 유럽 내 관세를 철폐키로 하는 대신 한국은 색조 및 기초화장품에 물리는 관세를 점진적으로 없애기로 합의했다. 대부분의 산업계가 ‘화색’을 띠는 가운데 화장품 산업만 유독 실색하는 이유다. 현재 8%인 관세가 없어지면 이후 5년간 화장품 산업에서만 연평균 186억원의 무역적자 요인이 생긴다. FTA로 생길 전체 적자 요인의 53%에 이르는 규모다. 화장품 산업의 100대 기업 중 46개가 유럽 업체이고, 그중 26개가 아직 국내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걱정을 키우는 점이다.

국내 화장품 시장은 이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다. 2007년 현재 시장 규모가 전 세계의 2.5%인 40억 달러에 달한다. 스페인·러시아에 이은 11위 시장이다. 성장률이 연평균 6% 안팎으로 중국·러시아·브라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하지만 관련 산업의 위상은 아직 초라하기만 하다. 시장의 절반가량을 외국 회사들에 내준 채 대부분이 값싸고 대중적인 제품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전체 생산액 4조원을 500개가 넘는 회사가 나눠 만들 만큼 규모도 영세하다. 생산액 중 수출 비중이 7%에 불과하다 보니 수입(7억5000만 달러)이 수출(3억 달러)의 두배가 넘는다.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코리아나 등이 최근 수출을 늘리며 선전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인 기업과 겨루기엔 역부족이다. 국내 1위인 아모레퍼시픽은 2007년 18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세계 19위에 올랐다. 23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9억 달러가 넘는 연구개발비를 투입한 1위 업체 로레알과는 한참 차이가 난다. “화장품에 대한 인식을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내수산업에서 수출품으로 바꿀 때가 됐다”(서울산업대 박수남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화장품 산업을 키울 필요성은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자리 창출 효과다. 국내 화장품 제조업체엔 모두 1만8000명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유통·판매엔 이보다 훨씬 많은 10만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생산유발계수(1.965)도 타 산업(전기전자 1.711)에 비해 높다. 사치품이라는 인식과 달리 친환경성도 뛰어나다. 오폐수 발생량이 다른 제조업체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생산액 대비 에너지 소비액의 비율도 1.82%로 매우 낮다.

기초과학과 의학을 자극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인류가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해 온 물질은 대부분 의료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몸에 직접 바르거나 먹는 물질이란 공통점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남녀 모두 안티몬이 함유된 휘안석이란 광물을 눈 화장용으로 썼다. 아름다움 외에도 사막의 메마른 기후에서 눈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티몬은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해 눈의 건조를 막아 줬다. 고대 사회에서 의사를 겸했던 승려들은 한센병 치료제로 이것을 쓰기도 했다. 몸에 해로운 납을 사용하면서까지 외면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해 온 화장품이 최근 다시 천연·청정·건강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을 놓고 ‘진화’이자 동시에 ‘제자리 찾기’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EU FTA로 위기를 맞게 된 국내 산업의 활로도 이런 추세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 화장품 업체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방 등 천연물질 활용과 나노기술을 응용한 제품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의 범위를 ‘얼굴’에서 ‘몸’으로 넓혀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황순옥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팀장은 “화장품 산업보다 미용과 피부관리 등 연관산업을 한데 묶는 ‘뷰티서비스 산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려면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수적이다. 숙명여대 서용구 교수는 “화장품은 유형의 제품 못지않게 무형의 브랜드 이미지가 큰 역할을 하는 상품”이라며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정책, 관광산업 진흥책 등과 연계해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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