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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침묵 속 첫 공식행보는 은평을 방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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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05면

그가 돌아왔다. 300여 일 만이다. ‘이명박(MB) 정권의 2인자’ ‘개국공신’ ‘실세 중의 실세’로 불리던 이재오(사진)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정치적 유배’를 마치고 28일 저녁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미국에 체류하던 그는 세상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본 하네다 공항을 거쳐 김포로 귀국했다. 인천 국제 공항을 일부러 피한 것이다. 그는 귀국 즉시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내려갔다. 29일부터 선산 참배 등 고향 행사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입국날짜는 극비리에 부쳐졌다. 최측근인 진수희 의원도 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26일 이후부터 (이재오 전 위원과) 연락이 안 된다. 한국에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해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300일 만의 귀환

박근혜, 온다면 오는 거죠

이런 몸조심은 공항에 환영 인파가 몰리면서 ‘구태 정치인’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 전 위원은 25일 자신의 팬클럽인 ‘재오사랑’에 “정말로 조용히 귀국하려 한다. 공항에 그 누구도 나오지 말아 달라”는 글을 올렸다. 같은 날 진 의원에게도 전화를 걸어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게 해 달라”고 당부했고, 진 의원은 팬클럽 회장에게 이 같은 입장을 전했다. 27일 팬클럽은 회원들에게 ‘(이 전 위원) 귀국에 즈음한 공항 출입 금지령에 협조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해 5월 출국 때 300여 명이 환송한 것과 대조적이다.

일부에서는 그의 조심스러운 귀국을 ‘정동영 학습효과’로 풀이한다. 22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귀국 때 인천공항에 2000여 명의 지지자가 몰린 데 대한 세간의 비판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모습이 오히려 정치적”이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자연스레 들어오면 될 것을 귀국부터 정치 이벤트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전 위원의 3월 말 귀국이 예고됐음에도 여의도 분위기는 일견 차분하다. 지난 연말 조기귀국설이 돌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 친박 쪽 김무성 의원은 이 전 위원의 귀국을 “전쟁의 시작”이라고까지 했었다. 친이계 내부도 이재오계를 제외하고는 귀국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선 친이계의 실질적 수장인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이 “내가 이 전 위원의 귀국을 반대하거나 늦췄다는 것은 오해”라며 귀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친박 측은 이렇다 할 입장 표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친박계의 한 인사는 “박근혜 전 대표가 최근 사석에서 ‘(이 전 의원이) 온다면 오는 거지요’라며 담담하게 반응했다”고 말했다. 친박계의 한 중진의원은 “망명을 간 것도 아니고 정계은퇴를 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며 “친박보다는 친이계 내부에서 계보 득실을 따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귀국’에 너그러워진 분위기는 귀국 시점과 관련이 있다. 연말과 달리 개각도 끝났고, 4월 재·보선에 출마는 물론 공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도 늦은 시기다. 이 전 위원이 귀국한다 해도 당장 정국에 파장을 불러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25일 친이계 ‘함께 내일로’ 모임에서도 이 전 위원의 귀국이 잠시 화제에 올랐지만 논의가 크게 진전되진 않았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이 전 위원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라며 “‘함께 내일로’도 느슨한 범 친이계 모임이라 (이 전 위원에게) 큰 힘이 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주위 여건을 감안한 듯 이 전 위원은 당분간 귀국 후에도 조용한 행보를 이어 갈 계획이라고 한다. 진 의원은 “인터넷과 주위의 전언으로만 접하던 국내 정치상황을 직접 보고 파악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라며 “과거와는 분명 달라진 이재오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행보’가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이미 여의도에서는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친박계 견제효과를 내면서 이 전 위원의 귀국길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귀국 후 첫 공식행보로 예정돼 있는 지역구 방문 때도 적잖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강석준 한나라당 은평을 당협위원회 사무국장은 “귀국 환영행사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문의전화를 받느라 다른 업무를 하기 힘들 정도”라고 열기를 전했다. 이 전 위원은 지난해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게 패한 뒤에도 명절 때 지역 인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꾸준히 챙겨 왔다. 문국현 대표의 재판 결과에 따라 10월 재·보선도 가능한 만큼 이 전 위원의 은평을 방문은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

4월 당협위원장 선출이 첫 시험대

한나라당 내 ‘구심점 부재론’도 그의 정치활동 재개를 앞당길 요소다. 정권 초기의 ‘이상득-이재오-정두언’ 3강 체제는 이 전 위원의 총선 패배와 출국, ‘권력 사유화 발언’ 이후 정 의원의 잠행으로 무너졌다. 이상득 전 부의장의 영향력이 커졌지만 대통령 친형이란 한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2년차를 맞아 정책 드라이브를 거는 시점에 추진력 강한 이 전 위원의 ‘역할론’이 거론되는 이유다. 이재오계 핵심인 공성진 최고위원은 “로키로 가려 해도 그게 맘대로 되겠느냐. 지역구를 가든 어딜 가든 사람들이 엄청 몰리지 않겠느냐”며 “그럴 바엔 일정한 롤을 주고 활동하게 하는 게 낫다. 특임대사를 맡아 베이징이나 도쿄를 돌아다닐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중국의 실력자들과 만나 북한 급변사태 대응책 등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4월 당협위원장 선출은 이 전 위원의 향후 행보를 점칠 수 있는 첫 시험대다. 1월에 결성된 ‘원외 당협위원장 협의회’는 이 전 위원의 든든한 지지세력이다. 하지만 복당한 친박 현역의원들로부터 “위원장을 넘기라”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당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이 전 위원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여권 내부의 풍향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달라진 이재오’를 보여줘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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