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Prism] 비정규직 문제 처리, 일본에서 배우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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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0면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일본 기업들이 직원을 마구 해고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 실업률(올 1월 4.1%)은 올해 하반기에 4%대 후반까지, 내년에는 5%대까지 오를 전망이다. 실업률 숫자만을 놓고 보면 미국과 유럽보다 양호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실업률은 8~10% 수준이다. 하지만 일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 기업의 해고 대상 1순위는 파견직을 비롯한 비정규직이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 소니와 도요타·닛산·마쓰다·미쓰비시 등이 비정규직을 내보내는 것을 뼈대로 하는 감원 계획을 줄줄이 내놓았다. 후생노동성은 지난해 10월~올해 3월에 해고될 비정규직 노동자가 15만 명을 웃돌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결과 고용 형태별 실업률이 큰 차이를 보였다. 정규직 실업률이 2%대인 반면, 비정규직의 상징인 파견직은 10% 선이다. 유럽의 실업률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정책 결과다. 일본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차례 규제를 완화했다. 1999년 근로자 파견사업에 대한 제한조치가 원칙적으로 해제됐다. 2003년에는 파견 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됐다. 2004년에 제조업에 대한 파견기간 제한마저도 없앴다. 그 결과 파견직 노동자 수가 99년 28만 명에서 2008년 140만 명으로 4배나 증가했다. 이들을 비롯한 전체 비정규직 비중은 99년 24.9%에서 2008년 34.1%로 늘어났다. 일본 기업들은 임금 삭감과 해고 등이 편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더 좋아했다. 특히 파견직은 계약기간 만료와 동시에 해고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정규직을 대신해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은 정규직보다 못하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대량 해고는 생계형 범죄 증가 등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급해진 일본 정부는 이런 사정을 감안해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긴급 경제 대책을 두 차례 발표했다. 모두 12조 엔을 투입해 경기를 부양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2조5000억 엔 정도가 실업 대책이다. 이 자금을 활용해 일본 정부는 비정규직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완화했다. 파견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사업주에게 장려금을 주기로 했다. 4000억 엔 정도를 투입해 공공단체 등이 비정규직을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취업지원센터를 더 많이 설치해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 취업을 적극적으로 돕고 나설 계획이다. 또 정부가 직업 훈련 기회를 제공해 비정규직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계획이다.

이런 조치들이 기대한 만큼 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일자리 대책은 대부분 경기침체에 대응한 단기적인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고용 환경을 개선하는 데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 근로자 파견제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먼저 후생노동상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는 제조업에서 노동자 파견을 금지하는 쪽으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견을 금지한다고 현재의 고용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 강화는 실적이 악화된 제조업의 일자리를 줄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파견 근로자를 쓸 수 있는 업종을 제한하기보다는 비정규직 근로조건을 개선하거나 그들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게 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다행히 일본이 이런 논쟁에 발목 잡혀 있지는 않다. 경기 침체가 오래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자 일본의 노동계와 사용자·정부가 노동시장 안정과 사회 안전망 강화 등 장기적인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가 바로 최근에 발표된 ‘고용위기에 대응한 공동방침’이다. 노사정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기업과 경제 성장을 지탱할 수 있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또 이런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이는 일본의 실업 대책이 지금까지 임시방편 대응에서 고용 구조까지 근본적으로 바꾸는 장기적인 대응으로 전환될 것임을 시사한다.

일본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아직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단계다. 일본도 이제 논의를 시작한 단계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책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마련한 대책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기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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