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연예인 ‘종이 족쇄’에 갇혀 사는 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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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영화 ‘매란방’의 장쯔이, 천카이거 감독, 리밍(왼쪽부터). [예가엔터테인먼트 제공]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고 영화가 더 중요시되진 않아요. 지난 30년간 중국은 상업주의를 바탕으로 급격히 변했습니다. 시장이 커지고 관객이 늘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돈으로 어렵게 영화를 찍었을 때보다 반드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닌 듯해요.”

영화 안팎에서 그는 고뇌하고 있었다. 중국 5세대 영화 감독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천카이거(陳凱歌·57). 신작 ‘매란방’을 들고 내한한 그의 고민은 시대를 고민하는 영화 속 경극 배우와 다르지 않았다. 2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영화를 찍는 게 쉽지 않다”며 “한국의 창작자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영화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란방’은 189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근대 격변기를 배경으로 실존했던 ‘경극대왕’ 매란방의 예술혼과 인생을 다룬 작품이다. 천 감독으로서는 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패왕별희’ 이후 다시 경극을 정면에서 다뤘다.

‘패왕별희’ 속 장궈룽(張國榮)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매란방은 전통 경극을 계승하되 현대 감각에 맞게 다채로운 형식을 도입한 대중 스타였다. 영화 속에서는 유명인으로서 책임감과 사적인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대표적인 게 ‘종이 족쇄’의 비유다. 예술가나 대중 스타는 내면에서 오는 책임감과 자존심 때문에 차마 스스로 찢지 못하는 틀 속에 갇혀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경극을 내세웠지만, 하려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것이에요.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예술가나 모든 사람이 처하는 문제라고나 할까요. 최근 한국 배우들의 자살 소식을 자주 접했는데, 그것도 일종의 종이 족쇄 때문이 아닐까요.”

실존 인물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아내를 두고도 결혼관계까지 맺었던 동료 배우 맹소동과의 관계를 모호하게 처리한 것이 그렇다. 유족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기자회견에는 매란방을 연기한 스타배우 리밍(黎明)과 맹소동 역의 장쯔이(章子怡)도 함께했다. 리밍은 나긋나긋한 말투와 섬세한 손동작으로 여장 배우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했다.

그는 “경극 배우로 활동 중인 매란방의 아들을 자주 만나고 자료를 참고해 캐릭터를 구상했다”며 “그 분이 영화를 보더니 ‘생전 아버지와 정말 닮았다’며 감탄해 마음을 놓았다”고 말했다. 영화 속 리밍의 경극 노래도 매란방의 아들이 부른 것을 립싱크 처리한 것이다.

천 감독은 “아시아인은 서양 문화와 다른, 나름의 역량을 갖고 있다”며 “한국 역시 남과 북이 갈라진 환경을 내적으로 이겨내고 그것을 문화에 반영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국 영화 위기론’과 관련해서는 “홍콩 영화가 90년대 이후 쇠퇴했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듯, 한국에도 훌륭한 인재와 아이디어가 많으니 다른 기회가 오면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덕담했다.

‘매란방’은 국내에서 4월 9일 개봉한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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