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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자 22면 기사 ‘과학기술 행정 무너진 느낌’ 과학계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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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교육·산업에 파묻힌 과학기술, 지금 위기다

과학기술이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현장에서는 도무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종합 조정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고, 그나마도 교육과 산업에 파묻혀 버렸다. 청와대·행정부·국회가 모두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이 홀대의 수준을 넘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정말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컨트롤 타워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무국도 없이 민간위원만으로 구성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허울뿐이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도 교육까지 덤으로 떠맡으면서 중심을 잃어버렸다. 연구개발 사업은 과학기술과 무관한 기획재정부의 몫으로 넘어가 버렸다. 미래를 종합적으로 설계하고 준비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대통령의 어록에서만 발견된다.

‘기초 원천’에 대한 집중 투자도 암초에 부닥쳐 버렸다. 애초의 50% 목표는 출발도 하기 전에 35%로 축소됐다. 기초 원천의 정체에 대한 소모적인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결과는 불을 보듯 확실하다. 결국 투자의 분류만 바뀌고, 산업체 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후진국형 연구개발 사업의 틀은 고스란히 남게 될 것이다.

출연 연구소도 길을 잃어버렸다. 아무 원칙이나 계획도 없이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가 출연연구소를 나눠 가진 것부터 문제였다. 소란스러웠던 기관장 교체와 황당한 통폐합 논란으로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더니 이제는 교과부 산하의 KIST가 지경부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출연 연구소의 앞날은 여전히 풍전등화다. 외국인의 힘이라도 빌리라는 패배주의적 요구가 과학기술계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다. 초대형 태풍인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다.

어렵게 출범하는 연구재단도 불안하다. 무작정 남의 제도를 베낀 탓이다. 연구재단의 핵심인 PM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외부의 영향력을 배제한다고 우리가 ‘집중 투자’와 ‘균형 발전’의 조화가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사회와의 불필요한 갈등은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정부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헌법적 책무다. 통치권 차원의 적극적인 관심과 실질적인 노력이 없으면 선진국형 연구개발 체제로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과학기술 행정의 컨트롤 타워를 되살리고, 교육과 산업에 파묻혀 버린 과학기술을 살려내야만 한다. 더 이상 망설이고 낭비할 여유가 없다. 과학기술계의 절박한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통령 의지 분명하나 컨트롤 타워가 없다

현 정부 과학기술 행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을 이끌고 가는 책임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도, 청와대 교육과학기술 수석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등이 있지만 회의기구나 자문역에 그칠 뿐 국가의 장기적인 과학기술정책을 끌고 나가는 조직이라고 볼 수 없다. 지난 1년간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의 부재를 과학기술계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 관련 양대 부처인 지식경제부와 교육과학기술부가 제각각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경부는 신성장동력 중심으로, 교과부는 577이니셔티브 계획으로 연구개발 전략을 짜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소도 두 부처가 절반씩 나눠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정책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첫 조각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추 박사를 에너지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과학기술 드림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녹색뉴딜과 초고속통신망 확충, 수학·과학 교육의 강화 등 미국의 미래를 준비하고 경쟁력을 강화할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의지는 분명하고 R&D 예산은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 전체의 R&D를 총괄 지휘할 최고과학기술책임자(CTO)를 하루빨리 임명하고 그 사람 중심으로 앞으로 4년간이라도 일관성 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기술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과학기술부의 부활이든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상설화든, 또 다른 방법이든 지금이라도 해답을 찾아야 한다. 경제위기의 해결이나 급한 교육현안에 밀려 과학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면 그 결과가 10~20년 뒤 국가 경쟁력의 위기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학진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사무국장

13개 연구기관 개편은 실용적 R&D 위한 것

기술은 인간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 국가의 경제철학을 반영하는 통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의 경제철학은 ‘실용’이라는 두 음절로 압축된다. 지난해 13개 산업기술 출연 연구기관을 ‘임무가 명확한 성과형 R&D 조직’으로 개편하게 된 것도 ‘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씀’이라는 실용의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산업기술 출연연의 임무는 산업 원천기술개발과 R&D 취약 계층 지원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시장에서 필요로 하지만 시장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원천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개발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시장이 ‘활용’할 수 있게끔 연구 전 주기에 걸쳐 수요자 지향성을 높이는 ‘실사구시’형 R&D를 지향해야 한다.

또 매일 수십 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있는 경제위기 속에서 R&D 취약 계층인 중소·중견기업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 역시 출연연의 중요한 임무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의 파고를 넘기 위해 모든 국가가 기업들을 측면 지원하는 데 경쟁적으로 뛰고 있다. 공공연구기관이 예외일 수는 없다. 현장 중심의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산업기술 출연연들은 현재 원스톱 형태의 중소기업 기술지원 허브망을 구축 중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과학기술 출연연은 산업기술과 기초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분화되었고 성과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기능을 재조정한 바 있다. 국가 연구개발 정책은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환경을 고려해 효율적으로 조율돼야 한다. 산업기술 출연연들이 신성장동력과 녹색성장을 중심으로 한 중장기 원천기술 개발과 중소·중견기업 지원을 병행하면서 균형 잡힌 국가 연구개발시스템의 선순환 체제가 정착될 수 있도록 기대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나경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