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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정신 살아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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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출입문을 여는데 아무리 해도 안 열리는 거예요. 안내하던 일본 사람이 웃더니 '손을 알코올로 소독하지 않으면 문이 아예 안 열리게 돼있다'고 설명하더군요. "

남양유업 박건호(57)대표가 기획담당 상무 시절인 1998년 천안에 새 공장을 짓기에 앞서 벤치마킹하려고 일본 우유업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위생과 청결이 생명인 우유공장에서 '손씻고 공장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공장이나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손을 안 씻으면 들어갈 수도 없게 한'발상에 그는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최첨단을 자랑하는 일본 업체에 대한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4년 후인 2002년 천안 신공장 준공 뒤 박 대표는 일본 업체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동종 업체 사람에게는 노하우 유출을 우려해 공장 보여주기를 꺼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견학을 허용한 데 대한 보답 차원이었지만 한편으론 우리 기술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천안 공장을 둘러본 일본 사람들로부터 "졌다"는 말을 들었다. 우유의 살균.균질(지방을 잘게 부수어 소화하기 쉽게 만드는 것) 등 제조 과정은 물론,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던 물류 부분까지 완전 자동화했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선 우유 상자도 로봇이 자동세척을 한다. 크기.종류가 제각각인 수백가지 완제품을 저온 창고에서 꺼내 전국 각지로 향하는 냉장 트럭에 헷갈리지 않게 싣는 것도 로봇의 몫이다. '손발을 안 씻으면 문이 안 열리는 시스템' 설치는 물론이다.

세계 우유공장 중 첨단 1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 공장을 짓기 위해 남양유업은 미.일.유럽 등 선진국 공장을 30여곳이나 벤치마킹했다. 종전 같으면 350명 쯤 필요했을 이 공장의 근무인원은 150명이다. 물류는 종전 20명이 하던 것을 3명이 한다. 3교대니까 사실은 한 명이 하는 셈이다. 1300억원을 투입한 이 공장 건설 때 물류 시스템에만 400억원을 들였다.

남양유업은 64년 설립 후 여지껏 노사분규가 없었고 감원도 없었다. 생산성을 높이려 자동화는 했지만 이로 인해 생긴 잉여 인력은 신제품 개발.생산 등에 투입했다.

적자낸 적도 없다. 본사는 40년간 사옥 없이 남의 건물에 세들어 있으나 공장은 전국에 4개를 갖고 있다. 부채비율은 0%다. 따라서 이자 지출이 없고, 지난해 은행예금으로 번 이자 수입만 100억원이 넘는다. 국내 분유.이유식 시장에선 점유율 60%로 1위, 우유는 2위를 달리고 있다. 올 들어선 중국으로의 수출도 시작했다. 한우물만 파서 계열사도 없다. 올해 경기가 나쁘다지만 이 회사는 매출 목표 1조원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해(7560억원)보다 30% 이상 늘린 수치다.

종업원 3000여명 중 오너 친인척은 한 사람도 없다. 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공기업에 잠시 다니다 경력사원(대리)으로 입사, 최고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그는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자체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도전이요, 과제일 뿐"이라며 "우리나라 기업인 가운데 아마 기업가 정신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헤어지면서 "국가의 경쟁력은 기업에서 나오고, 기업의 경쟁력은 기업가정신에서 나온다"는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부 규제.노사 문제 등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게 너무 많다" "한국은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등 말도 많지만 기업가 정신만 살아있다면 이런 것은 '극복할 수 있는 과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