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층 아파트도 턴 ‘스파이더맨 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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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월 18일 현금 20만원 도둑맞으셨죠. 범인 잡았어요.”(형사)

“우리집에 도둑이요? 거실에 놔뒀던 지갑이 비었기에 집사람이 몰래 빼간 줄 알고 대판 싸움까지 벌였는데…”(김모씨·42·울산시 남외동)

21일 오후 형사가 절도 피해자의 진술을 받기 위해 A아파트로 찾아가자 주인 김씨는 되레 좌불안석이었다. 도둑이 들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애꿎게 부인만 의심하고 몰아붙였는데 꼼짝없이 보복(?)당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김씨는 “14층 아파트인 데다 현관문이 열린 흔적도 없고, 신용카드·수표는 놔두고 현금만 없어졌다. 외부인 소행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23일 울산중부경찰서가 허모(40)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하면서 밝힌 피해자의 반응이다. 경찰에 따르면 허씨는 2006년 8월부터 최근까지 울산 중구 일원에서 빌라·아파트 90여 곳에 107차례 침입, 6230만5000원을 훔쳤다. 새벽 2~5시 주인이 잠든 시각 건물 벽면의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창문이 열린 곳만 털었다. 1~2층의 저층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5층 이상이고 14층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고층일수록 밤에 베란다 문단속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가스배관을 타고 스파이더맨처럼 고층 아파트를 오르내렸다. ‘배관만 되어 있으면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무제한’이라며 자랑까지 하더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범인은 키 1m80㎝의 날렵한 체격에 삼두박근이 매우 발달되어 있는 등 가스배관 타기에 타고난 체질인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허씨는 그러나 안방이나 거실에 놓인 금목걸이 등 귀금속, 카메라, 지갑에서 현금·상품권만 빼냈고 금액도 2만~30만원의 소액이 대부분이었다. 추적이 가능한 신용카드·수표는 손을 대지 않았다. 허씨는 TV에서 가스배관을 타고 가정집을 터는 사례를 보고 모방범죄를 벌인 혐의로 구속돼 1년간 복역한 뒤 2005년 12월 말 출소, 이듬해 8월부터 본격적인 절도행각에 나섰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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