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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끝나고 한 잔 알지" 뒤풀이는 시민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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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고가 무슨 수로 우릴 이기나?" "이 사람아,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각각 농.상고 출신으로 한 동네서 장사를 하고 있는 조영방(左).이종빈씨. 농.상전 기간만 되면 서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지만 30년 넘게 우정을 이어 온 친형제 같은 사이다.

공식적으론 28년, 비공식적으로 63년의 역사를 가진 농.상전. 그 세월에 묻힌 기막히고 우습고 흐뭇한 사연이 하나 둘일까. week&이 농.상전과 함께 울고 웃은 시민들의 갖가지 사연을 살짝 들춰봤다.

*** 경기 즈음엔 괜한 신경전

강원도청에 근무하는 이대용(54)씨와 부인 김순임(51)씨는 말 그대로 '농.상 커플'이다. 두 학교간 경쟁이 치열하던 60년대 말 각각 농공고와 상고(현 제일고)에 다녔다.

"전 학창 시절 배구 선수였어요. 훈련하고 대회 나가느라 농.상전엔 가지도 못했죠. 남편이 농공고 출신인 건 알았지만 그토록 라이벌 의식이 강할 줄은 몰랐어요."

경기장에서 남편을 따라 자연스럽게 농공고 응원단석에 앉자 동창생들이 '배신자'라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온 것.

"어쩔 수 없잖아요. 부부가 따로 응원하는 것도 그렇고…."

자리는 농공고 측을 택했지만 마음까지 바뀌진 않았다. 제일고가 골이라도 넣을 때면 펄쩍펄쩍 뛰며 좋아한 것. 남편은 주변 동문들에게 눈치가 보였던지 "뭐하는 짓이야. 사람 창피하게"라며 버럭 화를 내도 "모교 응원하는 게 당연하지"라며 물러서지 않았단다.

"경기 끝나고 집에 올 땐 툭하면 따로 왔어요.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농.상전 있을 즈음엔 괜한 신경전으로 각 방을 쓰기까지 했다니까요."

*** 아버지냐 형님이냐

농공고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 중인 J군. 그는 중학시절 양교의 스카우트 대상 0순위였다. 공교롭게도 J군의 친할아버지는 농공고를, 큰아버지는 상고를 나왔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J군 아버지로선 아버지와 형님 눈치를 모두 살펴야 될 입장이었다.

"두 분은 아무 말씀 안하셨어요. 그게 더 부담스러웠죠. 오히려 아버님 친구분이나 형님 동기분들의 은근한 압력이 많았죠."

좋은 선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억척스럽게 나서던 농공고 동문회측에서 꾀를 냈다. J군을 둘러싸고 양교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하던 2001년 11월 중순께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마을회관에서였다. 농공고 동문 한 명이 시치미를 뚝 떼고 J군 아버지에게 "아이고, 아드님을 농공고로 보내시기로 하셨다니, 잘 생각하셨어요."라며 운을 띄운 것. 미리 근처에 모여 있던 '바람잡이' 수십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잘 하셨어요" "암요. 그러셔야죠"라며 맞장구 치자 J군의 농공고 진학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J군의 큰아버지는 기분이 상했지만 흐믓해하는 아버지를 보자 차마 뭐라 얘기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지사. 당황한 J군의 아버지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라며 얼버무리자 "손자가 모교에서 뛰는 모습을 보게 될 할아버님이 가장 기뻐하시겠어요"라는 말로 상황 종료.

*** 티격태격 40년 우정

금학동 '곶감전 네거리'에서 각각 제화점과 약국을 운영하는 조영방(61.농공고 34회).이종빈(60.제일고 21회)씨. 33년째 나란히 장사를 하는 이웃사촌이지만 한때는 거의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사이다.

재학 시절 양교 축구시합에서 진 농공고 학생들이 상고로 쳐들어가 학교를 엉망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 그때 있던 농공고 학생들 중 한 명이 바로 조씨였다.

둘은 이곳에 가게를 내면서 처음 알게 됐다. 서로 "어느 고등학교 나왔느냐"고 물었다가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러나 같이 소주잔도 기울이고 경조사를 챙기면서 이제는 철마다 부부동반으로 양양 송이버섯 축제.정선 민속장 등을 같이 다닐 정도가 됐다. 사진 찍으러 밖으로 나와 달라는 기자의 말에 "네가 우리 가게로 건너 오라"며 서로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결국 길 한가운데서 찍기로 합의를 봤다. "아이고 저 얼굴 좀 봐라. 술 좀 그만 마셔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두 사람에게서 '진정한 라이벌'의 모습이 묻어났다.

*** 교장들도 모교 출신

농공고 김학래 교장과 제일고 이용인 교장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각각 모교에 부임했으니 올해 농.상전은 교장으로서 맞는 첫 '타이틀 매치'인 셈이다. 그러나 '45년 우정'을 쌓은 친구이기도 하다. 강릉중학교 동기동창으로 단짝 친구였지만 졸업 후 각각 농공고와 상고로 진학했다. 그 뒤 만나기만 하면 "우리 학교가 한 수 위"라며 입씨름을 벌였고 농상전 때는 응원하느라 목이 쉬기도 했다. 졸업 후 나란히 교사의 길로 들어선 두 사람. 농.상전의 무기한 중단 계기가 됐던 82년 폭력사태 때 둘은 모두 농공고에 재직 중이었다.

"내가 농공고 학생들 편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친구도 농공고 제자들을 먼저 챙기더군요.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 텐데 …." 김 교장의 추억이다.

글=최민우.신은진.김필규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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