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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분노할 줄 모르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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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보인 반응은 시밤(Shibam) 테러 이틀 뒤인 17일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발표한 규탄 성명이 거의 전부다. 정부는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실무적인 테러 대책회의를 열기는 했다. 정부로서는 나름대로 애로가 있을 것이다. 사건 자체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동의 구석에서 일어났다. 테러 집단에 대한 정보는 미국이나 예멘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테러 희생을 너무 부각시키면 오히려 테러 집단의 조준경(照準鏡)이 ‘한국인’을 더 노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한국의 침묵이 과연 이런 이유 때문만일까.

오랜 기간 한국인에겐 ‘테러〓북한’이었다. 그들은 1968년 박정희의 청와대를 공격했고, 70년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83년 버마 아웅산에서 남한의 장관들을 죽였고, 87년엔 젊은 여자를 시켜 여객기를 폭파했다. 극악무도한 일이었지만 한민족의 역사와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살폭탄 벨트나 조끼는 없었다.

한국인에게 이슬람 테러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2004년 6월이었다. 한국 군납업체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돼 참수(斬首)당했다. 3년 뒤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선교단이 납치됐다. 탈레반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오랫동안 감금했다. 이런 일이 겹치면서 한국인에게 이슬람 테러는 지워버리고 싶은 추하고 공포스러운 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혹시 우리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한국인 테러라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혹시 그런 ‘트라우마(충격에 따른 스트레스 장애)’가 생긴 건 아닐까.

이런 트라우마가 있다면 사건에 정면으로 반응하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야구가 일본과 드라마를 펼치고 베네수엘라를 초토화시키는데 왜 예멘을 생각해야 하는가. 자살한 여배우의 리스트에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는데 왜 예멘의 폭탄벨트를 떠올려야 하는가. 당장 코앞의 개성공단이 막혔다 뚫렸다 난리인데 왜 머나먼 예멘까지 고민해야 하나. 알카에다가 준동하고 중동이 위험하다면 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 한국인들이 혹시 이런 심리에 슬슬 젖어 드는 건 아닐까.

테러는 피한다고, 덮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테러나 납치에 대해 첫 번째 할 일은 분노하고 규탄하는 것이다.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비(非)이슬람적인가를 외쳐야 한다. 어차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지만 그래도 외치고 외쳐서 알카에다를 문명세계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

테러의 피해를 적극적으로 알릴 때 자유와 인권의 동맹은 더욱 강해지고, 한국은 더욱더 문명세계의 주역이 될 수 있다. 테러 용의자를 감시하고, 대책을 세우고, 여행을 자제하는 건 그 다음 일이다. 정말로 나라가 분노해야 할 때, 대통령부터 분노해야 한다. 반(反)인륜을 규탄하고 한국이 반테러 국제 대열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천명해야 한다. 대통령의 적절한 분노와 용기가 국민을 달래 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