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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밥' 맛있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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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꼭 대형 슈퍼마켓에 들른다. 그 나라, 그 지역에서는 어떤 먹을거리가 인기인지 어떤 음식을 해 먹고 사는지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발견한 것이 '스시용 쌀'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쌀 제품이다. 이미 '스시'라는 음식을 온 세계에 알린 일본은 자국의 쌀을 '스시용 쌀'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쌀알이 둥글고 끈적한 자포니카 쌀을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스시를 먹고부터는 쌀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여주와 이천의 쌀을 으뜸으로 친다. 얼마 전 여주군에서 인증했다하는 쌀밥집을 갔었다. 갖가지 찬들이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지고 돌솥엔 주인공 쌀밥이 나왔다. 돌솥의 뚜껑을 거두니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이로 보이는 쌀밥에 윤기가 좌르르 하다. 맨 먼저 이 뜨끈뜨끈한 밥을 함께 나온 밥공기에 퍼 담는다. 밥알 하나하나가 적당히 찰진 상태에 씹는 재미도 있는 그야말로 '맛있는 밥'이다. 돌솥에 얇게 남아있는 누룽지엔 뜨거운 물을 붓고 밥을 먹는 동안 뚜껑을 덮어둔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면 마지막엔 자연히 우러난 숭늉을 먹는 것이 입가심이다. 역시 우리는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밥'이 우선이다.

한번은 여행 중에 쌀밥이 그립기도 했고 홈스테이 식구들에게 우리쌀밥으로 불고기 쌈밥을 만들어 주고도 싶어 마트에 갔다. 근처에 한인슈퍼도 없고 우리나라 쌀과 비슷한 것이라곤 스시용 쌀 밖엔 없어서 아쉬운대로 그 쌀을 구입했다. 냄비에 밥을 짓고 밑에 눌은 밥으로는 숭늉까지 만들었다. 밥 맛이 우리 쌀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자포니카 쌀이니 만큼 길쭉하고 훌훌 날아가는 인디카쌀을 내놓는 것 보다는 나았다. 불고기와 쌈장을 만들어 쌈밥 먹는 법을 알려주니 생전 처음보는 쌈밥에 즐거워하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찰진 쌀이 색다르고 씹는 맛이 생각보다 맛있다고 했다. 그게 우리나라의 여주나 이천쌀이었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끈적한 쌀에 대한 벽을 허무는데 반은 성공이었다.

남은 쌀로 어떤 다른 한국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 왔다. 생각해보니 우리 쌀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떡, 술, 감주, 엿, 죽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식사용으로 만들만한 '요리'가 될 만한 메뉴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탁위의 '밥'은 그냥 '밥'일 뿐인데 쌀이 주식이 아닌 그들이 이걸 한번에 이해 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고민끝에 덮밥 몇 가지와 미역국의 조리법을 알려줬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홈스테이 주인 아주머니가 남은 쌀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상 위에 올렸다. 바로 '쌀 샐러드'. 과연 기발한 생각이었다. 쌀을 끓는 물에 데치 듯이 익혀내고 찬물에 헹군다음 각종 채소들과 함께 넣고 간장과 식초로 새콤달콤한 드레싱을 만들어 버무려 낸 것. 밥 그릇에 담긴 밥이 익숙한 내가 보기엔 모양새가 좀 요상했지만 일단 먹어보니 차가운 파스타 샐러드를 먹는 것처럼 쫀득하게 씹히는 맛이 꽤 좋았다. 아침식사를 대신하기에도 괜찮을 만한 메뉴였다.

얼마 전 한식의 세계화와 관련한 한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요리사 피에르가니에르는 우리 쌀을 먹어보고 이렇게 말했다.
"밥알이 씹히는 느낌이 일품이고 익힌 정도도 알맞다. 이 밥으로 디저트를 만들면 좋겠다. 밥 위에 설탕을 살짝 뿌리고 말린 과일과 바닐라빈을 곁들이면 서양인들이 좋아 할 만한 디저트가 될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누가 지금껏 쌀을 차가운 샐러드와 달콤한 디저트로 만들 생각을 해 보았겠는가.

김은아 칼럼니스트 eunahstyl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