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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컬처코드 ⑬ ‘장자연 리스트’가 말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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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해 TV 드라마에서 보던 일이 현실이 된걸까? 방송제작현장을 그린 SBS ‘온에어’다. 유능하지만 악질 매니저 진상우(이형철)는, 자신이 키우는 배우 오승아(김하늘)에게 재벌2세 광고주의 술시중을 강요한다. 그녀가 말을 듣지 않자 욕설에 손찌검을 한다. 소속사를 바꾼 오승아는 섹스비디오 유출에 휘말린다. 한때 진상우의 연인이었던 신인 탤런트는 거친 연예바닥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상태다.

탤런트 고 장자연씨 사태는 여러가지로 이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자살 전 쓴 문건을 통해 ‘성상납, 술시중 강요, 폭력’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얼추 비슷한 상황이지만 드라마와 뉴스의 무게감은 천양지차다. 엔터테인먼트업계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영화배우 전지현씨의 소속사가 휴대전화를 불법복제해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언론계·기업 인사들로 넘어갔다. 공식 발표가 없었음에도 인터넷에는 이미 명단이 떠돌아 다닌다. 명단 공개를 요구하는 여론의 압박 속에 명예훼손의 우려도 나온다. 다행스레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적 변화 움직임도 보인다. 매니지먼트업계의 투명화, 기획사와 연예인 간 표준계약서 도입, 엔터테인먼트법 제정 등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8일, ‘연예매니지먼트업 등록제’ 등을 정부 입법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불공정 계약을 막기 위한 표준약관 도입에 들어갔다. 아예 국가가 매니저들에게 공인 자격증을 발급하자는 제안도 나온다(방송영상산업진흥원 하윤금 박사). 주 정부가 연예 에이전시에 라이선스를 주는 미국식 모델이다. 이와 함께 연예기획사의 제작 겸업 금지 논란도 재개될 전망이다.

그러나 한 연예 관계자는 “노예계약은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지고 투명해졌다”며 ”매니저와 기획사들만 악의 소굴로 모는 것은 절반의 해법”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문제있는 기획사도 분명 있지만, 오디션 같은 정당한 절차 대신 접대와 인맥을 통해 끼워넣기 식으로 캐스팅하는 관행 자체, 접대를 당연시하는 언론사·기업 쪽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짚어주고 있다. 실력보다 인맥이 중시되며, 술과 여자가 동원되는 향응이 있어야만 비즈니스가 되는 한국적 밤문화 말이다. 물론 이는 법· 제도 이전에 관행과 문화의 문제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욱 강고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남성적인 접대문화, 밤문화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한, 성적 서비스의 수단으로 착취되고 꺾이는 ‘나약하고 힘없는’ 제2· 제3의 장자연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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