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현장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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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전자출판 성장 주춤, 인문 - 사회과학 약진. ' 지난 15일 시작해 20일까지 열리는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멀티미디어의 열기가 가라앉고 그동안 위축됐던 종이책이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49회를 맞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지구촌 최대의 책잔치라는 명성에 걸맞게 올해에도 외형적 성장세를 지켜나갔다.

참가 출판사는 1백7개국의 9천5백87사. 미국을 제외한 세계 전반의 출판불황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보다 3.7% 늘어난 수치다.

전시면적도 1천2백여평 늘어난 5만6천여평에 30만여종의 책이 소개됐다.

그러나 지난 93년 '프랑크푸르트는 전자화로 간다' 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야심적으로 출발했던 전자출판의 상대적 약세가 눈에 띄었다.

전시본부측은 지난해보다 6.5% 늘어난 1천6백여사가 참석했다고 발표했지만 관련업체들이 집결한 전자 출판관에 나온 상품들은 지난해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방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검색하는 기능을 갖춘 백과사전등 사전류, 3차원 영상과 생생한 음향을 구비한 지도.여행 안내서류에 나타난 전자출판의 강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의 출판사가 CD롬과 함께 유료 인터넷을 개설, 앞으로는 인터넷이 전자출판의 중추로 자리잡을 것임을 예고했다.

전자출판의 위축은 막대한 투자비에 비해 종이책을 압도할만큼 뚜렷한 장점이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 따라서 인쇄매체와 전자출판은 앞으로도 발을 맞춰가며 각기 '비교우위' 영역을 지켜갈 것으로 예상된다.

일반 단행본으로는 철학.역사.고고학 등 인문과학 서적의 출간이 활발했다.

영국의 옥스포드.케임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등 대학출판부는 물론 프랑스의 갈리마르, 독일의 데테베 등 대형 출판사들의 신간목록에는 동서양 고대문명에서 시작해서 현대 과학문명에 이르는 인류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책들이 다수 올라 있었다.

특히 서구인들 상상력의 원천인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경 등 신화.종교 관련서가 많이 띄었다.

이같은 경향은 무엇보다 세기말을 눈앞에 둔 현재의 위상과 미래 지향점을 과거의 경험 속에서 새롭게 정리하려는 서구인들의 시도로 풀이된다.

최근 2~3년동안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고대문명에 대한 책들과 같은 맥락이다.

여러 출판사들이 2000년대의 사회상을 미리 그려보는 예측서들을 1~2종씩 내놓은 것도 유사한 심리와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미국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문명의 충돌' 에서 주장한 것처럼 민족.종교.지역간의 갈등을 조명한 책들이 눈에 두드러진다.

이번 도서전의 또다른 의미는 향후 문화의 전개상을 예감케 했다는 점. 저작권 거래라는 단순 도서전의 형태를 넘어 책과 예술, 책과 기술, 책과 지역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종이책과 멀티미디어의 결합, 테크노아트 예술가들의 전시, 통신망을 통한 유럽지역 도서관 통합 구상, 선진국과 제3세계간 문학교류 활성화를 위한 토론등은 앞으로의 문화 혹은 문화행사가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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