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효상이 말하는 ‘슬로’] 부딪치며 사는 재미 아는가 집에서도 길게 걷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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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물을 지을 때 비워 둘 공간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 공간을 채운다. 이 비어 있는 공간이 슬로 공간이다.”

건축가 승효상(사진)은 한 뼘 한 뼘이 돈인 땅을 비우고, 질러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건물을 짓는다. 그의 공간들은, 그래서 불편하다. 그는 이런 건물을 슬로 건축이라 부른다. 왜 그는 슬로한, 그래서 조금 불편한 건물을 지을까.

-슬로 건축이 뭔가.

“빠른 성장과 편리함이라는 지난 시대의 화두는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했나 하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우리 옛집의 사랑방과 마당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또 식당·침실과 같은 기능이 아니라 방에 상을 펴면 식당이 되고, 이부자리를 깔면 침실이 되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이런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기능보다 반기능적인 건축물을 짓자는 거다.”

-왜 공간을 비우는 게 중요한가.

“도시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살다 보면 법률이 필요하다. 법률이 공간적으로 나타난 게 도시의 공공 영역인 빈 공간이다. 도로·광장·공원 등 도시의 빈 공간이 서로 잘 연결돼 사람들이 그 공간에 늘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유 재산인 땅에 빈 공간을 만들면 불편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건축이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집을 짓더라도 돈은 내 사용권을 획득하는 것일 뿐이다. 건축물 옆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건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건축은 공공적인 가치를 많이 가졌다.”

-지은 건물이 불편하다는 불만은 없나.

“집의 동선이 길어봐야 얼마나 기나. 사람이 찾아오면 걸어 나가 문도 열어 주고 하는 게 삶 아닌가. 복도가 좁으면 가족들이 지나다니며 살도 부딪치고 길게 걸으며 생각도 하는 게 사는 거다. 이게 슬로 라이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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