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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회 ‘카더라’ 망령에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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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뉴스분석 사이버 공간에 ‘카더라 통신’이 난무하고 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를 놓고서다. 이 리스트엔 재계·언론계·정치권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망라돼 있다. 리스트 등장 인물에겐 고(故) 장자연씨에게 성상납과 술시중을 강요한 ‘공공의 적’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이 리스트는 사이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들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주요 포털에서 인기 검색어 1위가 ‘장자연 리스트’일 정도다. 다양한 버전의 리스트가 쉴 새 없이 ‘퍼나르기’ 된다. 중·고등학생과 동네 아줌마까지 리스트를 ‘소문과 억측’이 아닌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디지털사회의 신뢰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 유통 경로는 고(故) 최진실씨 사건 때의 판박이다. 증권가 메신저→블로그→포털사이트 게시판→퍼나르기의 순서를 밟으며 사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리스트 등장 인사들이 실제 장자연씨와 관계가 있었는지는 수사를 통해서만 확인될 사안이다. 그럼에도 익명의 그늘에 숨어 확산되는 ‘카더라 통신’은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일화다. 영부인 관련 루머가 인터넷에 나돌아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루머가 더욱 확산됐다. 결국 청와대는 수사 중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5월 탤런트 김태희씨의 결혼 루머와 2008년 1월 가수 나훈아씨에 대한 악성 루머, 2008년 9월 ‘연예인 X파일 2탄’ 등은 카더라 통신을 통해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선 사이버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의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는 “실명을 공개한 네티즌들에 대한 처벌이 쉽지 않아 책임감 없는 폭로가 난무하고 있는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보전염병’에 취약한 네티즌 문화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상당수의 네티즌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인터넷상에서 새롭게 설정된 의제에 매달리며 퍼나르기를 하다 보니 일종의 전염병처럼 확산된다는 것이다. 2005년 본지가 포털사이트 다음과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글쓰기 상위 1%의 네티즌들이 인터넷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인터넷의 강력한 전파 능력이 루머 확산에 큰 역할을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포털사이트의 댓글이 이틀 만에 오프라인을 움직이고, 오프라인에서 형성된 여론은 다시 온라인으로 되돌아와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신뢰가 무너져 루머를 양산하고 있다는 설명도 나온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자체가 카더라 루머에 취약한 구조다. 정부와 경찰을 믿을 수 없어 이런 루머가 지속되고 있다 ”고 밝혔다.

장자연 리스트를 둘러싼 루머를 일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찰의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 경찰이 국민의 의혹을 말끔히 해소시킬 수준의 수사 결과를 내놓아야 사이버 공간에서 루머가 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양승찬 숙명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경찰 수사가 루머 유통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수사 결과를 신속하게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희 사건사회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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