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발등의 불 기후변화협약 … 멈칫거리다간 국가적 재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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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은 지난 17년간 반쪽짜리 협정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기후변화협약을 주도해온 미국이 조지 W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논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의회 비준을 거부하면서 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도 불참 대열에 들어섰다. 이 협약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무역 보복을 가한다는 무시무시한 벌칙이 포함돼 있지만 정작 강대국들이 발을 빼면서 사실상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최근 이런 국제사회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기후변화협약을 해결하겠다고 공약했다. 지난달 24일 의회 연설에선 신재생에너지에 방점을 찍으면서 “의회도 온실가스 배출총량 규제를 포함한 관련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미 의회의 기후변화협약 비준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중국의 입장도 뚜렷하게 변하는 조짐이다. 지난주 양제츠 외교부장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선진국과 개도국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후변화협약이 세계적인 대세가 된 것이다. 오는 12월 덴마크 코펜하겐 회의에서는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국제협정의 탄생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에서 세계 9위다. 그 증가율은 단연 1위다. 여기에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기도 하다. 우리 국회가 기후변화협약을 비준한 2002년에는 다행히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곧바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삭감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국제 분위기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최근 기후변화 국제회의에 참석한 고건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은 “한국과 멕시코는 당연히 온실가스 의무감축국으로 지정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며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만약 올해 말 의무감축국으로 결정되면 2012년부터 우리는 강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온실가스 감축은 엄청난 비용을 의미한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 밑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화 사업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에는 고스란히 부담으로 작용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기후변화협약 기준에 맞추려면 국내 경제가 마비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하지만 지구를 살리고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고통스럽지만 앞으로 3년 정도의 유예기간 동안 치열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느슨하게 대처하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이미 유럽연합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도 탄소배출권 할당과 배출권 거래제 도입을 마냥 늦출 수는 없다. 정부가 앞장서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기업과 국민의 공감대를 끌어내야 한다. 필요하면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기업들의 자발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영국이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총량을 강력히 규제하는 독일 모델을 모두 참고해야 한다. 에너지 과소비에 물든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시급하다. 마음대로 에너지를 쓰고 온실가스를 마구 뿜어내던 시대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