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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분배 대신 ‘성장 간판’ 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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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민주당의 슬로건은 ‘중산층과 서민의 벗’이다. 민주당의 전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회의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이 내걸어온 당의 이념이자 정체성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이 슬로건을 바꾸려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진보가 중시해온 ‘분배’ 대신 ‘성장’을, 중산층·서민뿐 아니라 그동안 경원시해온 부유층, 나아가 특권층까지 끌어안자는 것이다. 그래서 슬로건도 ‘모두를 위한 번영’으로 바꾸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본지가 15일 입수한 ‘뉴 민주당 선언 초안’에 따르면 민주당은 ‘뉴 민주당의 비전’으로 ‘온정적이면서 유능한 정당’과 ‘성장과 기회의 정당’을 제시하고 있다.

‘뉴 민주당 비전위원회’(위원장 김효석 민주정책연구원장)가 지난해 10월부터 20차례의 회의를 거쳐 도출한 결론이다. 여기엔 당내 인사는 물론 당 밖의 인사들도 참여했다. 최근 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위원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초안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 안을 최종 당론으로 보긴 힘들다. 분배와 서민을 앞세워온 민주당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이어서 경우에 따라선 치열한 당내 정체성 논쟁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분배’ 간판 내리고 ‘성장’ 간판을=‘뉴 민주당 선언’은 대선 패배 이후 당내에 퍼져 있는 무기력증과 낮은 당 지지율을 돌파하기 위해 마련됐다. “보수와 진보의 낡은 이분법을 뛰어넘어 신중도개혁이란 제3의 길을 내세워야만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다.

특히 “냉혹하지만 유능한 산업화 세력과 온정적이지만 무능한 민주화 세력의 대결 구도로는 향후 선거에서 필패한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비전위원회는 지난해 9월 낸 ‘뉴 민주당 비전 자료집’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당 지지율은 답보 상태”라며 “국민들에게 유능한 대안 정당으로 비춰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비전위원회가 6개월간의 고심 끝에 내놓은 새 비전은 ‘지속 가능한 성장’과 ‘모두를 위한 번영’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도 추가했다. 이를 토대로 현재의 ‘민주-평화-개혁’이란 3대 가치를 ‘더 많은 기회-더 높은 정의-함께하는 공동체’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비전위원회는 “새로운 진보의 길은 좌·우의 일차적 직선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꼭짓점이 존재한다”며 제3의 길을 추구하겠다는 점을 선언 초안에 명시했다.

외국 사례집도 발간했다. 미국 민주당이 1980년대 대선 참패 이후 90년 ‘신 민주당 선언’(New Orleans 선언)을 하고 ▶강한 정부와 강한 민간 ▶친기업과 친노동 ▶친성장과 친분배 ▶교육의 수월성과 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중도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던 사례를 인용했다. 이후 ‘새로운 진보 선언’(96년)→ ‘하이드 파크 선언’(2000년)→ ‘뉴 민주당 선언’(2003년)이 이어졌고, 그 결과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정체성 논쟁 재연될 듯=민주당은 4·29 재·보선 이후 논의를 거친 뒤 이 선언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우선 뉴 민주당 선언(1단계)을 토대로 뉴 민주당 정강정책 발표(2단계)→뉴 민주당 정책집 발간(3단계)→ 매니페스토 발간(4단계)의 로드맵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무엇보다 뉴 민주당 선언문에 ‘분배’ 대신 ‘성장’‘이란 단어가 최종적으로 채택되기 위해선 당내 반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최근 이 초안이 발표된 중앙위원회에서 “전통적인 당의 색깔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당내에선 열린우리당 시절 이른바 ‘런닝구-빽바지 논쟁’을 회상하며 치열한 정체성 논쟁의 후유증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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