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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04>燕京大 설립한 미국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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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 15일 옌징(燕京)대 졸업생인 여류 작가 빙신(빙 心)과 사회학자 우원짜오(吳文藻)의 결혼식에 혼증인으로 참석한 쓰투레이덩(뒷줄 한가운데). 김명호 제공

쓰투레이덩(司徒雷登·1876∼1962)은 미국인 존 레이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의 중국 이름이다.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중국 친구들과 골목에서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모도 중국인이었다. 순수한 미국인이었지만 할 줄 아는 말이라곤 항저우 방언밖에 없었다. 11세에 미국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을 때 영어를 못 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시쯔(西子) 호반의 연 잎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가 그리워 얼 빠진 표정을 짓곤 했다. 괴물 취급을 받았다.

1904년 28세 때 선교사가 돼 부인과 함께 항저우로 돌아왔다. 부친이 사목 활동을 하던 톈수이탕(天水堂)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고향에 오니 숨통이 트이고 살 것 같다”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1908년 난징에 신학원이 설립되자 교육자로 변신했다. 한때는 AP통신의 특약기자로 활동했다.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 양위를 발표할 때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외국 기자였다.

1918년 미국 기독교연합회는 베이징에 옌징(燕京)대를 설립했다. 교장 후보자들을 물색했다. 유사시에 중국 편을 들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쓰투는 후보자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타임지의 설립자 헨리 루스의 부친이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외국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인의 묘한 심리를 꿰뚫어볼 줄 안다. 중국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라며 쓰투를 적극 추천했다. 쓰투는 난징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만류했지만 이듬해 1월 교장직을 수락했다. “중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양국 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기를 남겼다.

쓰투는 부임한 날부터 두통에 시달렸다. 중국인 교수 두 명에 학생은 100명이 채 안 됐고 외국인 교수들은 한결같이 자격 미달이었다. 교실 5개에 기숙사 3개 동(棟), 주방·욕실·도서관·교직원 사무실이 한 칸씩 있었다. 테니스장과 농구장도 있었지만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친구들을 찾아 다니며 모금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볼 때마다 “저들에게 배워야 한다”며 그들의 집요함에 감탄했다. 기부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쓰투레이덩은 새로운 학교 부지를 알아보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베이징 교외를 돌아다녔다. 위안밍위안(圓明園)의 정남쪽에 호수를 낀 노는 땅이 있었다. 명(明)말 서화가이며 괴석 수집가였던 미완중(米萬鍾)의 별장 댜오위안( 園)이 있던 곳이었다. 산시(陝西) 독군(督軍) 천수판(陳樹藩)의 부친이 부인들과 노년을 보내기 위해 구입한 사유지였다.

모금한 돈 30만원을 들고 시안(西安)에 내려가 천을 만났다. 아들과 함께 온 쓰투의 설명을 듣던 천의 부친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날 밤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중국인을 교육시키기 위해 대학을 짓겠다는 외국인에게 돈을 받고 땅을 팔면 그 학교는 중국인 학교가 아니다. 그냥 줘라. 너 때문에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쓰투는 장쉐량의 소유였던 웨이슈위안(蔚秀園) 등도 매입해 교지를 확보했다. 미국에서 설계사를 초빙해 중국식 궁전을 본뜬 건물 66동을 지었다. 지금의 베이징대다. 하버드의 옌징 학사도 쓰투가 설립했다. 쓰투는 국민당이 패망할 때 주중 미국 대사였다. 공산화된 후에도 중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쫓겨났다. 상징적인 추방이었다. 지난해 11월 그의 유골이 항저우로 돌아왔다. 중국은 쫓겨난 사람이 다시 오는 것을 허락하기까지 60년이 걸렸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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