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필체에서 풍기는 향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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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연례행사처럼 넘기는 한글날에 엉뚱한 제안 하나 하고 싶다.

"부모들이여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의 공책을 들춰보자" 고. 원하는 학교 진학조차 힘들어진 마당에 부모들에게 자녀의 공책필기에까지 신경쓰라는 요구는 지나칠는지 모른다.

우리도 초등학교나 중등학교에서 한글과 영자쓰기 훈련을 시킨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성장해 대학생이 되고 또 사회에 나온뒤 자리잡힌 글씨체를 보면 가관이다.

컴퓨터가 많이 보급돼 개인서신조차 갖가지 멋낸 인쇄체로 만들어 주고받는 현실이긴 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글씨체는 사람의 성격과 인물 됨됨이를 내비친다고 했고 서양에도 사람 구하는데 필체를 중요하게 보는 까다로운 이들이 적지 않다.

학교성적표나 추천서 못지 않게 필체에서 풍기는 인간의 향기가 상대를 평가하는데 무시 못할 기준이라는 얘기다.

지난 주말 워싱턴 포스트지는 딸을 프랑스초등학교에 보내며 느낀 파리특파원 엄마의 고뇌를 싣고 있다.

학교에 제출하는 숙제를 옛날 깃털펜을 개량한 필기구로 작성케 하며 내용 못지 않게 글씨체를 중시하는 교육에서 비롯된 미국인 모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프랑스에선 세례받는 12~13세 아이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선물이 만년필이고 대개의 경우 이를 평생 간직한다고 한다.

작고한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은 자신의 서명이 필요한 문서에 고무인을 사용치 않고 직접 펜을 들어 서명하는데 하루 한시간씩을 할애했다.

그리고 간혹 공식서한의 말미에 친필로 개인적인 메시지를 덧붙이기도 했다.

국가 정상 (頂上) 의 인간적 체취가 스며있는 서한을 받아보는 이들의 가슴설렘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아무리 바쁜 삶이지만 잉크병에 펜촉을 담가 메시지를 전하는 분위기를 떠올려 보라. 수업시간이나 업무시간에 책상머리에 앉아 손가락 끝에서 볼펜 돌려대는 모습을 국내에선 더 이상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사라진 이 야릇한 행태가 베이징 (北京)에선 여전히 '성행' 이란다.

아무튼 이처럼 성의없이 글쓰기는 아무리 정서가 메말라가는 사회라지만 고치고 싶다.

느끼고 싶고, 보고 싶고, 또 무엇인가 듣고 싶은 계절에 볼펜을 던져버리고 잉크를 찍어 쓴 편지 한통 써보자고 한다면 과연 사치일까. 그리고 내친 김에 자녀들의 공책을 들춰보고 비뚤어진 획을 바로잡아 주며 부모노릇 한번 해보는 것도 한글날의 정신과 크게 동떨어진 일은 아닐듯 싶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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