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이익 줄자 짝짓기로 위기 극복 몸부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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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32면

미국 제약회사 머크의 최고경영자(CEO) 리처드 클라크(62)는 별명이 ‘전기톱’이다. 전기톱처럼 직원들을 싹둑싹둑 자른다는 뜻이다. 그는 2005년 CEO가 된 직후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2008년 말까지 공장 다섯 곳을 문닫고 전체 직원의 11%인 7000명을 내보내겠다는 방안이었다. 그는 발표한 대로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그리고 지난 9일 411억 달러를 들여 셰링-플라우를 사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구조조정으로 마련한 돈을 경쟁회사 매수에 쓰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유능한 경영자로 격찬받을 만한 일이다.

제약 공룡들의 1500억 달러짜리 빅딜

그러나 시장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M&A 발표 직후 주가는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20~22달러 사이를 오르내릴 뿐이었다. 클라크는 뒤늦게 기자회견을 열어 M&A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는 “이번 M&A 덕분에 머크가 세계 최대 제약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시장에 주입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시장은 다른 제약회사 빅딜에도 시큰둥했다. 화이자 주가는 지난 1월 와이어스와의 합병 추진이 발표된 이후 떨어졌다. 당시 17달러대였는데 요즘은 14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례적인 풍경은 이것만이 아니다. 스위스 로슈는 이미 미국 제넨텍의 대주주였다. 지분 56%를 보유하고 있었다. 글로벌 자금난이 한창인 지금 거금 468억 달러를 들여 나머지 지분 44%를 사들이기로 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그동안 로슈가 제넨텍의 독자성을 인정했으나 한 몸이 되기 위해 나머지 지분까지 사들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왜 시장이 대형 M&A에 시큰둥하고, 로슈는 거금을 들여 남은 지분까지 사들여야 했을까. 세계적 컨설팅 회사 AT커니의 M&A 전문가인 프리츠 크뢰거는 12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생존의 무게 탓”이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메이저 회사들이 성장 등 장래 비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M&A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또 시장이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형 짝짓기에도 무덤덤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혁신의 결핍’이 낳은 위기
전문가들은 메이저 제약회사들의 성장 사이클이 일단락됐다고 진단한다. 1960년 이후 40년에 걸친 초대형 성장 사이클이 끝나간다는 것이다. 그 기간에 제약회사들은 대형화·다국적화를 거쳤다. 막대한 자본력을 자랑했다.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신약을 개발해 전 세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특허 보호 기간에는 입맛대로 가격을 정할 수 있었다. 그만큼 순이익은 컸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혁신의 결핍(Innovation Deficit)’ 탓이다. 이는 엄청난 돈을 연구개발에 쓰지만 신약은 쉽게 나오지 않는 현상이다. 글로벌 제약업계에선 ‘10억 달러 대 0.6개’라는 자조적인 말이 유행한다. 10억 달러를 쏟아 부어야 신약 0.6개가 개발된다는 의미다.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96년 10억 달러를 쓰면 3.13개 정도가 개발됐다.

게다가 앞서 나온 히트 약품의 특허 보호 기간은 조만간 다 끝난다. 미국 시장에서 10대 히트 약품 가운데 6종의 보호 기간이 이미 끝났다. 화이자의 고지혈증 치료제인 리피터 등 남은 4종이 올해 말부터 2010년 말 사이에 순차적으로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 다른 제약회사들이 동일한 약품을 개발해 놓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기가 되는 순간 동일한 약을 더 싼값에 내놓을 요량이다. 메이저 제약회사 매출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자업자득이라고 지적한다. 90년대 말 신약 수익률은 전반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건강보험회사들이 앞장서 제약회사의 신약 값 떨어뜨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노인단체와 정부를 부추겨 제약회사가 신약이라는 이유로 약값을 턱없이 높게 매기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제약회사들은 연구개발 인력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바이오 벤처기업 등이 신약을 개발하면 회사 자체를 인수하거나 특허를 사들이면 된다고 판단했다. 성장 엔진을 스스로 망가뜨린 셈이다.

스위스 제약 전문가인 위르겐 드루스는 “세계 50대 제약회사가 현재 연간 10개 정도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며 “그들이 연평균 5%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약 19개 정도가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연평균 10%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약 30개가 더 개발돼야 한다. 혁신 결핍 증상 와중이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AT커니의 크뢰거는 이런 성장률 하락을 ‘죽음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그는 “메이저 회사들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이 골짜기에 들어선다”며 “그래서 자원을 총동원해 몸집 불리기를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덩치를 키워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경쟁사 M&A 실패 기다리는 곳도
세계 M&A 규모는 절정기였던 2006년 이후 30%씩 줄어들고 있다. 사모펀드와 기업 사냥꾼들은 동면기에 들어갔다. 유동성 거품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디플레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자금 여유가 있는 기업도 매수 대상 회사의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인수를 서두르지 않다 보니 값이 더 떨어지는 현상이다.

바로 이런 시점에 메이저 제약회사 M&A 열풍은 뜻밖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은 “메이저 제약회사의 자금 사정이 다른 업종보다 조금 괜찮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제약업계 M&A는 2003년 한 차례 절정에 이른 뒤 잠잠해졌다. 다른 업종보다 일찍 시작돼 빨리 끝난 셈이다. 이후 메이저 제약회사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상당한 자금을 비축했다. 앞서 소개한 머크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메이저 제약회사들도 자제 자금만으로 400억 달러 이상 되는 인수대금을 다 치르기 어렵다. 외부 자금을 적잖이 조달해야 한다. 화이자는 투자은행 등을 중간에 내세워 250억 달러를 빌릴 계획이다. 최근 글로벌 자금시장 상황에 비춰 그 일이 수월하지 않을 수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과 스위스의 사노피-아벤티스는 화이자 등이 돈을 마련하지 못해 M&A가 중단되면 자신들이 포획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또 M&A가 진행되는 와중에 제3자가 끼어들 수 있다. 실제로 머크와 셰링-플라우가 합병을 선언했지만, 미국 존슨&존슨이 셰링 주주들에게 러브콜을 할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한 회사를 두고 2~3개 인수자가 나서는 얽히고설킨 짝짓기 마당이 열릴 전망이다. 그들의 경쟁은 신약 개발만큼이나 치열할 듯하다. 이번 M&A 열풍에서 뒤처지면 성장률이 떨어지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남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짝짓기 열풍이 지나고 나면 기존 10대 제약회사들이 4~5개로 줄어들 것으로 점친다. 금융그룹 크레디스위스의 제약 담당 애널리스트인 캐서린 아널드는 12일 CNN머니와의 인터뷰에서 “합병으로 탄생한 제약회사는 신약 개발, 동물약품 제조, 건강관리 등 약품과 관련된 모든 부문을 아우르는 수퍼마켓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포스트 M&A’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 지붕 아래 여러 부문을 거느리면 경비 절감 등 좋은 점이 많을 듯하지만, 조직 관리 자체가 방만해질 가능성도 크다. 이를 막기 위해 M&A를 선언한 이후 성공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집 키우기가 만능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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