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번역본 잇따라 발간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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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누구나 배웠던 다음 구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에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 바로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제2장 한글시 전문이다.

'용비어천가' 는 잘 알려진대로 한글로 된 최초의 작품.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이 한글 공식반포 1년전에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널리 알린 대서사시다.

그러나 지금껏 '용비어천가' 는 일반 독자들이 그 면모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었다.

흔히 '용비어천가' 하면 1백25장의 한글시만을 떠올리지만 '용비어천가' 는 이 외에도 한글시를 번역한 한문시, 각 시의 내용을 한문으로 풀이한 해설, 또 이 해설에 대한 한문 주석으로 구성됐기 때문. 사실 시와 해설로 짜여진 본문보다 주석 부분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최근 잇따라 나온 '용비어천가' (솔출판사刊) 와 '역사로 읽는 용비어천가' (들녘) 는 전문가들 서재에 꽂혀 있던 '용비어천가' 를 일반인들 책상으로 끌어내린다는 유사한 시도를 펼치고 있다.

우선 들녘출판사의 '역사로…' 는 2대에 걸친 역사학자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용비어천가의 첫 번역으로 인정되는 고 (故) 김성칠 서울대교수 (51년 타계)가 지난 1948년에 번역한 내용을 그 아들 김기협씨 (사학자.전 계명대교수)가 보완.증보했다.

원작 자체가 '시경' '서경' '자치통감' 등 중국측 자료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측 자료에서 발췌.인용한 만큼 이번에 김기협씨가 원역자인 부친의 번역을 엄밀한 고증을 거쳐 새롭게 펴낸 것. 일반인들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석은 가급적 생략해 완역본은 아니지만 주로 국문학.국어학계에서 논의됐던 '용비어천가' 를 역사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용비어천가' 는 조선 개국 당시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이 김기협씨의 입장. 특히 중국 고사 (故事) 를 많이 끌어들인 탓에 사대주의 성향이 짙다는 기존의 상식적 견해와 달리 사료의 선택과 적용 모두 당시 지식인들의 주체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판단의 결과였다는 사실에 무게를 싣고 있다.

한편 솔출판사 책은 '용비어천가' 의 전체 내용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완역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나온 관련서들이 대부분 시를 위주로 한 해설서이거나 주석의 번역 없이 본문만 옮겼던 것에 비해 방대한 분량의 주석도 하나하나 꼼꼼히 옮겼다.

옮긴이는 연세대 이윤석 (국문학) 교수. 지난 92년부터 3년에 걸쳐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번역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 일반인을 위해 현대어 감각에 맞게 손질했다.

책읽기의 편의를 고려, 주석부분을 각 페이지 밑에 각주처럼 처리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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