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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 따뜻하게 커피향 맡으며 기다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해양씨가 탄 어선이 기상 악화로 부서졌다. 김씨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졌지만 다행히 구명조끼를 입어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김씨는 침착하게 구명조끼에 있는 수신기 버튼을 누른다. 그의 위치는 지상에 있는 해양구조센터의 컴퓨터 모니터에 빨간 점으로 표시된다. 위도 N 37도 15분 21.96초 경도 E 126도 59분 7.98초.

잠시 뒤 구명조끼 안에 들어있던 70℃의 발열체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심장 부위를 따뜻하게 해준다. 더불어 향긋한 커피향이 피어오른다. 불안과 추위에 떨던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로부터 3시간 뒤, 해양청 수색기가 김씨를 발견해 구조한다. 무게 3kg 남짓한 구명조끼를 입은 덕에 김씨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조난자의 위치를 알려주고 해경이 추적하는 동안 저체온증을 막아주는 기능성 구명조끼가 나왔다. 개발자는 수원 삼일공업고등학교 발명창작과 오종환(50) 교사. 오씨는 전자부품업체 디캡일렉트로닉스를 통해 이달 말부터 구명조끼를 시중에 내놓을 예정이다. 2008년 4월 국내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

구명조끼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PS)에 의한 위치추적장치가 달렸다. 조난자가 스위치를 켜면 추적장치가 미리 등록된 구조대의 컴퓨터 모니터에 조난자의 위치(위ㆍ경도)를 자동 으로 송출한다. 빨간 점으로 표시되는 조난자의 위치는 30초 간격으로 최대 72시간까지 컴퓨터에 기록된다. 해경이나 해군 등은 이 표시를 따라 조난자 수색에 나선다.

조난자의 대부분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구명조끼 안에는 바닷물에 닿으면 자동으로 열을 내뿜는 장치가 부착돼 있다. 석회석, 마그네슘 등 총 6가지 화학물질을 일정 비율로 섞으면 3시간동안 60~70℃의 열을 내며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는다. 이 발열체는 체온이 36.5℃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준다.

수증기에는 커피향이 들어있다. 발열체를 구성하는 물질 중 하나가 커피 향신료이기 때문이다. 조난자는 익숙한 커피향을 맡으면서 잠시나마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 오 교사의 말이다. 오 교사는 "밤이라면 시커먼 바다가 자신을 삼킬 듯 몰아치겠지만 따뜻한 커피향을 맡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체온이 유지되면서 조난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조끼가 앞으로 인명 구조에 많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ㆍ사진ㆍ동영상=이지은 기자

▶ [오씨와의 일문일답]

한 때는 개그맨이 꿈이었던 오종환 교사. 28년 전 개그맨 공채 시험을 쳤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낙방했다. ‘내 길을 이게 아니구나’라고 낙심한 오 교사는 대학 졸업 후 인도네시아의 한 무선통신업체에서 10여년 간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를 당해 한국으로 귀국했고 더이상 민간업체에서 일할 수 없게 됐다.

전자통신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지난 1994년 삼일공고 교사로 부임했다. 2008년 3월 전국 최초로 발명창작과를 신설했고 올해는 위치추적과 저체온증을 방지하는 기능성 구명조끼를 상품화했다. 드라마 같은 삶, 지난 4일 수원에 위치한 삼일공고 교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구명조끼를 만들게 된 계기는
"지난 2007년, 내가 이끌고 있는 발명동아리 ISV(Invention Student Venture)에서 조광진(현 성균관대 컴퓨터공학과 09) 학생이 아이디어 하나를 내놨다. 조군은 보트가 전복돼 한가족 7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다고 한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 하면 이같은 사고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다기능 구명조끼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때부터 나와 조군, 그리고 동기생 장정준(현 건국대 컴퓨터공학과 09) 학생이 뜻을 모았다."

-어떤 과정을 거쳤나
"구명조끼의 송ㆍ수신장치 개발은 내 전공분야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발열체였다. 처음에 만든 구명조끼는 발열체의 지속 시간이 50분 밖에 되지 않았다. 보통 난파 신호가 뜬 뒤 해경이 구조를 하러 출동하기까지 30분(?) 내외가 걸린다. 최대 3시간까지 발열이 돼야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난관에 부딛쳤지만 화공과, 기계과 선생님들이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알려줬다. 직장을 다닐때 쌓아놓은 인맥을 통해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도 전수받았다. 방학땐 학생들과 새벽 2시까지 실험하느라 아내에게 눈총도 많이 받았다."

-교사로서는 개발비가 부담됐을텐데
"당시엔 기업체의 협찬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구하는 2~3년 동안 사비 8000여만원을 쏟아 부었다. 다행히 중소기업청에서 최우수 아이디어상을 받았고 정보통신부 창업경진대회 장관상, 대한민국 특허대전 금상 등을 수상하자 해양청에서 인명 구조에 필요한 제품이라며 제안서를 보내라고 했다. 2007년 2월엔 해경 소속 특수부대가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빠져 구조되는 시연까지 보였다. 제품을 완성하는데까지 2억여원이 소요됐다. 일부 비용은 현재 구명조끼 계약을 맺은 업체가 지원해줬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겠다
"매번 업데이트 되는 구명조끼의 성능을 실험할 곳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바다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루는 아들 녀석과 목욕탕 냉탕에 들어가 뜨거운 김은 잘 나오는지, 위치는 파악이 되는지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옆에 있던 사람이 목욕탕 주인에게 신고(?)를 한 모양이다. 바로 쫓겨났다."

"지난 2006년 자가진단화재경보시스템을 개발해 미국 소방청(USFA)과 100만 달러의 수출 가계약을 맺었다. A건물에 화재가 났다면 2분 내에 건물에 있는 모든 소화기에서 경고음이 난다. ‘나 여기에 있으니 빨리 불을 끄세요’라는 신호다. 또 소화기에 달린 센서는 바로 화재신고센터에 접속돼 911로 자동연결된다. 시제품은 만들었지만 여러 사정상 수출이 홀딩된 상태다.

-발명창작과는 전국에서 유일한데
"이 학교에 처음 왔을땐 전자통신과 교사를 맡았다. 해외에서 근무할 땐 프로젝트 하나를 수주하려고 몇 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일했는데 학생들만 가르치려니 살짝 지루해지더라. 그래서 학생들과 재밌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 ‘발명’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2002년엔 학생 3명과 발명동아리 ISV를 만들어 아이디어 상품들을 하나둘씩 만들어봤다.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 다양한 제품들을 가지고 대회에 나갔더니 꽤 반응이 좋더라.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다. 고등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발명품을 상품화시키지 못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2007년에 아예 과(科)로 만들어 버렸다."

-홧김에 과를 만들었단 얘긴가
"오기가 생겼다. 대한민국 발명 교육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예로 현재 우리나라 다수의 창업대회에는 고등학생의 출전이 금지돼 있다. 고등학생도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상품을 만들어 돈을 벌 수 있는데도 말이다. 큰 의미로 보면 일자리 창출에도 큰 효과가 있을텐데 말이다. 현재 발명창작과에 재학중인 학생은 1ㆍ2학년 총 76명이다. 지난해부터 특허청에서 5년간 총 15억을 지원받고 있다."

-발명 교과서는 전무후무하지 않나
"발명과 관련된 자료를 말 그대로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해외 각종 사이트와 도서관은 물론 한국과학단체총연합회, 창의력교육개발원, 특허청, 중기청, 중소기업진흥공단 등과 각 지역의 공업고등학교 교사들, 서울대 등 대학 공학박사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교과서에 실을 내용들을 수집했다. 교과서 심의 때 ‘지식 강국인 나라는 선진국이다’라는 문구 하나에도 “왜 그런가”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그만큼 까다롭다. 경기도교육감인정 도서로 인정받았다."

-앞으로 계획은
"아이들의 발명에 대한 관심을 개발로 끝내는 게 아니라 사업화까지 할 계획이다. 해외엔 고등학생 사장들도 많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투자자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런 인프라가 형성돼 있지 않다. 고등학생의 참신함이 사장되는 것이 안타깝다. 아이들이 창의적인 사고로 다양한 발명품을 내놓고 이것을 가지고 창업까지 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 CEO형 에디슨을 배출한다고나 할까."

-구명조끼 수익은 두 학생에게도 지급되나
"당연하다. 일단 수익과 별도로 두 학생에게 대학 4년 등록금을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 구명조끼 1개당 15만원선이다.(수신기 제외) 현재 해양청ㆍ수협중앙회 등과 판매 협의 중이다. 이야기가 잘 되면 학생들과 수익을 나눠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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