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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고어와 이회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느 조직에나 '우등생' 은 있게 마련이다.

그는 하는 일에 언제나 우수하다.

자신에 대한 주변의 평판에 남보다 많이 신경쓰고 자기관리에 엄격하다.

미국 부통령 앨 고어도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하원.상원의원을 거쳐 지난 5년간 빌 클린턴 대통령아래 부통령직을 수행해 오기까지 늘 우수하고 성실하고 깨끗했다.

'미스터 클린' 이라는 그의 호칭은 혼탁한 정치판에서 결코 손쉽게 얻기 어려운 명예였다.

클린턴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집권초부터 줄곧 유난히 돈.섹스문제들로 세상을 시끄럽게 해 왔다.

그동안 고어는 이같은 스캔들의 와중에서 청량제 혹은 도덕적 보루와 같은 자리를 지켜 왔다.

그에 대한 미국민의 인식은 정직성과 신뢰감이었다. 자연히 그는 2000년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의 가장 강력한 민주당 선두주자로 앞서기 시작했고 공화당에서 누가 나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고어를 상대하자면 크게 고전 (苦戰) 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새는 얘기가 달라졌다.

한동안 잘 나가던 '미스터 클린' 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있다.

최근 법무장관이 그에 대한 '예비' 조사를 개시한다는 공식발표가 있었다.

그에 대한 혐의사항은 단순하다.

연방정부 건물 안에서 선거자금 모금통화를 했다는게 그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백악관내 집무실에서 기업인 등 46명의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헌금을 요청했고 그 결과 12만달러가 걷혔다는 것이다.

미국 공무원 복무규정은 공무원이 정부청사 안에서 선거자금을 요구하거나 수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 또는 3년 이상 금고 (禁錮) 형으로 다스리게 돼있다.

더군다나 그가 모은 돈이 통상적인 정당운영자금 (소프트 머니) 으로 사용된게 아니라 특정후보 선거자금 (하드 머니) 으로 활용된 사실이 최근 언론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그의 위법사항이 더욱 불거진 것이다.

하드 머니로 사용된 것이 사실이라면 한도를 초과한 모금이 되는 것이다.

반대당 공화당의 고어 공격은 치열하다.

수사를 전담할 특별검사를 임명하라는 공세가 만만치 않다.

이에 불응할 경우 법무장관 재닛 리노를 탄핵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특별검사 임명은 바로 고어의 대통령 꿈이 무산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미국 특별검사의 수사라는 것은 금세 끝나는게 아니다.

어쩌면 2000년 선거때까지 계속되면서 그를 수시로 괴롭힐 뿐만 아니라 선거자금을 내놓으려던 사람들도 도망가기에 바쁠 것이다.

그는 평생 대통령준비를 해 온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상원의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듣고 보는게 모두 정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워싱턴의 호텔이 소년시절의 집이었다.

하버드대 재학때 이미 대통령의 야망을 키웠다.

이제 와서 정부청사내 통화 때문에 평생의 꿈을 버리게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사실 클린턴은 그와 비교가 안 되는 스캔들 투성이의 인물이다.

그래도 그는 요새 지지도가 59%에 이른다.

'미스터 클린' 은 34%로 곤두박질이다.

사람들은 클린턴이 구린 데는 많아도 국민을 도우려는 따뜻한 마음만은 확실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고어에 대해서는 '가슴' 보다는 '두뇌' 쪽 인물로 바라본다.

성장과정이나 행실 모두 선망대상이고 곧바르기 때문에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 허점이 눈에 더 띄는 것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 인물이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면 그 순간부터 시련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갈수록 그때까지의 명성과 명예가 훼손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정치지도자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이같은 숙명적 도전을 어떻게 극복해 자신의 용량 (容量) 을 국민에게 설득시키느냐, 바로 그것이 지도자의 과제고 요건이다.

이 점에서 아들의 병역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국의 이회창 (李會昌) 씨와 미국의 고어는 동병상련 (同病相憐) 케이스인 셈이다.

한남규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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