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배우 손태영)와 함께 지난달 태어난 아들(권룩희)을 돌보며 TV 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권상우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룩희’는 아이의 태명 ‘루키(rookie)’를 한글로 쓴 이름이다. [코어콘텐츠미디어 제공]
모험이 분명하다.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그 어떤 장르보다 중요한 게 멜로영화 아니던가. 내용도 ‘신파’라 불리워도 할 말 없는, 대책 없는 순애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숨기고 자신을 대신해줄 괜찮은 남자를 찾아 결혼하게 한다니,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기는 한 걸까. 자, 과연 관객들(특히 여성들)은 이 배우의 지순한 눈물에 스크린 밖의 현실을 잊고 폭 빠져들 수 있을까.
◆애 아빠도 멜로 영화 주인공 할 수 있다=11일 개봉하는 ‘슬픔보다 슬픈 이야기’에서 불치병을 앓는 라디오 PD 케이를 연기한 권상우(33)는 이러한 의문에 기대 이상의 확답을 돌려준다. 애 아빠도 멜로영화 주연을 성공리에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유 있게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로 유명한 원태연 시인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원 시인 특유의 감성, 좋게 말해 애틋하고 나쁘게 말해 낯간지러운 느낌은 영화에서도 그 수위가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케이의 연인 크림(이보영)의 ‘사랑하는 데 말이 필요하면 벙어리는 어떻게 사랑하니?’라는 대사를 비롯해, 케이와 크림이 주고 받는 ‘사랑은 양치(아무도 보지 않아도 늘 하고 있다는 뜻)’ ‘결혼은 칫솔꽂이(한 울타리에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산다는 뜻)’등의 비유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원태연식’ 표현이죠. 감독님은 사람의 감정을 참 쉬운 말로 가슴에 와닿게, 재미나게 쓰는 능력이 있으세요.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순정만화 같은 비현실적 설정이지만 아주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될 것 같진 않았어요. 촬영하면서 내내 ‘내가 만약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불치병에 걸렸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봤는데, 그러다보니 케이 같은 남자가 현실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어요. 케이와 크림은 둘다 고아니까 케이가 떠나면 크림은 정말 이 세상 천지에 혼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떠나기 위해 좋은 사람과 맺어주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작품에 목마르다=영화가 제목값(슬픔보다 더 슬픈)을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치과의사 주환(이범수)과의 결혼식을 앞두고 크림과 케이가 함께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대목에서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크림의 눈부신 모습에 메어지는 가슴을 참을 수 없던 케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거리에서 하염없이 흐느낀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고, 그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고생하며 찍었다. “날씨가 너무 춥고 계속 걸어야 하니까 눈물이 흐르는 족족 말라버렸어요. 교통 통제하고 찍으니 운전하던 사람들은 길 막힌다고 소리 지르지, 해는 저물지, 눈물은 잘 안 나오지…. 나중에는 입에서 막 욕이 절로 나오더라고요(웃음). 제가 이 영화에서 바라는 건 한 가지밖에 없어요. 관객들이 극장 나서면서 ‘손태영 참 결혼 잘 했네, 나도 저런 남자한테 사랑받아봤으면 좋겠다’는 얘기 하는 거에요.”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로 ‘배우 권상우’의 탄생을 당당히 알렸던 그는 여전히 좋은 작품에 목마르다. “같이 한 번 일해보고 싶은 감독님들이 있는데, 전 안 불러주시더라고요. 멜로를 다시 한다면 박진표 감독님과, 액션을 하게 되면 곽경택 감독님과 했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영화다’를 참 인상깊게 봤는데, 장훈 감독님 신작에도 출연하고 싶어요. 허진호·김대승 감독님도요. 봉준호 감독님은 스케줄을 알아보니 너무 바쁘실 것 같고(웃음). 작품이 제게 큰 의미가 있다면 출연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왜 그들이 권상우를 부르지 않는 것 같냐고 농담 삼아 물었다. 인터뷰 내내 솔직하고 거침 없던 그는 역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안 땡기나보죠, 하하.”
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