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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치졸한 ‘중·불’ 감정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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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영·불 연합군이 150년 전 약탈한 중국 원명원의 쥐·토끼상 경매와 관련, 최근 온라인 여론조사를 했다. 세계의 관심이 쏠렸기 때문인지 홈페이지 접속이 폭주했다. 다른 조사 때보다 열 배 이상 많은 8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반환하라’는 응답이 86%나 됐던 것이다. 조사해 보니 중국에 거주하는 네티즌 수만 명이 무더기로 ‘반환하라’를 눌러댄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여론조사의 ‘융단폭격’은 지난해 몇 차례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국인들의 집단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당시 유럽의 인권운동가들은 티베트 탄압을 비난하며 성화 봉송을 방해했다. 당시 티베트 청년들도 파리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거리에서 국기를 흔들었다. 잠시 뒤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을 듯한 중국 유학생의 오성홍기 물결이 티베트기를 뒤덮어 버렸다. 그들은 ‘중국’을 연호하며 티베트인들을 밀쳐냈다. 그들은 며칠 뒤 프랑스 정부가 성화 봉송 훼방꾼들을 고의로 방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으며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티베트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자 중국에서는 프랑스 상품 불매 운동과 프랑스 여행 보이콧 운동까지 일어났다. 잠잠해지던 반(反)프랑스 정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달라이 라마를 만나자 또다시 불매 운동과 규탄 시위로 이어졌다.

중국의 인해전술식 테러에 잇따라 혼쭐이 난 프랑스에서도 이번에는 반중(反中) 정서가 불거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 정부가 경기 침체로 어수선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천박한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르 피가로 역시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사형시켜야 하는가’라는 온라인 여론조사를 한다면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수천만 중국 네티즌이 들고일어나지 않겠느냐고 꼬집기도 했다.

중국은 프랑스뿐 아니라 지난해 성화 봉송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마치 자기네 안방인 양 행인들을 때려가면서 행패를 부렸다. 그때도 중국 젊은이들은 ‘애국’과 ‘민족’이라는 단어로 모든 걸 정당화하려 했다. 이번 경매 건의 경우 중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걸 힘과 숫자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세련되지 못한 방식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프랑스의 치졸한 태도 역시 대국답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은 프랑스가 중국에서 훔쳐온 물건을 경매하면서 빚어진 소동이다. 중국 정부와 국민의 원성이 들끓는데도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개인이 선의로 취득한 문화재여서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다”는 식의 비공식적인 반응이 전부였다.

기자는 2007년 한덕수 당시 총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프랑수아 피용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 약속을 이제라도 지켜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처럼 “박물관 직원들이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재여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피용 총리의 대답은 “우리는 고속철도와 외규장각을 바꾸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였다. 실망스러웠다.

약탈물을 반환하기 시작하면 파리 한복판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부터 이집트로 날아가야 할 판이니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당장 현실적으로 반환이 어렵다면 약탈 사실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예의라도 보여야 할 텐데 그런 여유도 겸손함도 갖추지 못한 게 문화 대국 프랑스의 현주소다. 20세기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했던 고(故) 이브 생 로랑의 소장품 경매가 대국들의 천박함과 치졸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감된 것 같아 유감스럽다.

전진배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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