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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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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 순간, 박근혜 전 대표의 모습이 보이자 농성장이 술렁거렸다. 취재진이 일제히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박근혜 전 대표는 취재진 수십 명이 몰려들자 계단을 다시 내려가 넓고 평평한 입구 로비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평소 같으면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쳤을 박 전 대표다. 머쓱해진 현직 박희태 대표는 자리를 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준비해온 듯한 발언을 또박또박 뱉어냈다.

 “여당이 그간 양보를 많이 했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도 노력을 했으니, 이제 야당이 양보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야당이 처리 시한을 확정해 주어야 여당도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야당이 이를 거부할 경우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하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흘려듣자면 별 내용도 아니다. 여당의원이면 누구나 할 만한 얘기다. 그러나 뜯어보면 무게 있는 뉴스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동안 여당의 속도전에 반대해 왔다. 처음엔 쟁점 법안 내용을 못마땅해했다. 지난 1월 5일 아침 박 전 대표가 최고중진 연석회의에 출석했다. 역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출현이었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도 작심한 듯 “법안들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점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날 여야는 쟁점 법안 처리를 2월 임시국회 이후로 미루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1월 임시국회 정상화를 위한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그런 박 전 대표가 사실상 쟁점 법안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농성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법안의 내용과 절차 면에서 여당이 양보했으니, 이젠 야당이 양보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야당이 “미디어법을 100일간 논의한 뒤 표결 처리하겠다”는 양보 안을 내놓았다. 박 전 대표의 요구에 화답하는 듯했다. 2월 임시국회를 마무리하는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물론 이런 변화를 박 전 대표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여야 지도부와 국회의장이 주고받은 치열한 대화와 타협의 결과다. 박 전 대표는 마지막 순간에 잠시 나타났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박 전 대표가 어부지리를 노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일부에선 우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영향력이다. 박 전 대표가 쟁점 법안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1월 5일 발언은 분명 다음 날 협상 결과에 대한 한나라당 강경파들의 불만을 눌러주었다. 이후 친박(親朴) 의원들은 쟁점 법안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으며, 한나라당의 속도전 동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한나라당의 일부 친이(親李) 의원들 사이에서 ‘박근혜 공포’라는 열패감까지 퍼지기도 했다. 사실상 한나라는 반쪽 정당이었다.

 거꾸로 2일 박 전 대표가 야당의 양보를 촉구하자 한나라당의 사기는 올라가고 민주당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박 전 대표가 로텐더홀에 나타난 것을 본 일부 민주당 당료들이 뒤늦게 기자들을 상대로 박 전 대표의 발언 내용을 취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농성하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서로 박 전 대표를 “이쪽으로 오시라”며 모셨다.

박근혜의 힘은 비공식적인 힘, 보이지 않는 힘이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힘이다. 힘이 있기에 이전투구 속에서도 승리는 가능했다. 박근혜의 승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짐이다. 대통령 입장에선 박근혜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숙제가 재확인된 셈이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