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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박정희시대] 17.수출 제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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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출목표 달성실적을 분석해 보면 상주공관이 없는 지역의 수출이 오히려 잘되고 있습니다.

…수출목표가 미달된 공관에는 경고장을 보내고 앞으로 인사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냉각됐다.

"첫 회의라 상견례 수준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라는 긴장의 빛이 참석자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해외공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한다면 하는' 朴대통령이 아니던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의 증언. "해마다 열리던 외무부 해외공관장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보고사항은 주재국에 대한 수출실적이었어요. 수출 성적표가 좋으면 유능한 대사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대사는 정말 죽을 맛이었죠. 그래서 당시 대사를 '수출대사' 라고 불렀습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65년 1월부터 매달 열리던 수출진흥회의가 확대 개편된 것이다.

4년만에 정계.관계.경제계.학계.법조계등 각계 주요 인사 1백명 안팎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로 탈바꿈했다.

朴대통령은 이 회의를 다목적용으로 활용했다.

민간학자들을 초청, 관료들로부터 듣지 못하는 바깥의 얘기를 듣는 한편 각계에 수출관련 긴장도를 전파하는 장 (場) 으로 삼았다.

또 "대통령은 우리 편" 이란 인식을 기업인들에게 심어줘 '수출 기업인의 기 (氣) 살려주기' 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장에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사람은 69년부터 74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남덕우 (南悳祐.72) 씨. 수출증진과 고도성장을 주문하는 朴대통령에게 기업인들은 항상 돈부족을 호소하게 마련이었고,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장관이 집중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회고. "회의가 열리면 나는 늘 피고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경제4단체장과 기업인들은 재무부가 돈줄을 죄어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지요. 나는 통화량이 늘어나면 인플레가 오고 물가도 뛰는 악순환이 되풀이 돼 경제안정을 이룰 수 없다고 반박했지요. 그러면 朴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회의 후에 청와대로 따로 불러 '南장관, 쥐어짜지만 말고 돈좀 풀어' 라고 지시하곤 했죠. 아, 그러면 별 수 있나요. 대통령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실무자를 불러 중소기업 자금 50억원만 풀라고 지시를 내렸죠. "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신나는 회의였다.

고민거리를 한 보따리 준비해 왔다가 朴대통령 앞에 모두 풀러놔 '즉석 결재' 를 받는 셈이었다.

당시 朴대통령과 정부가 어느 정도 수출기업에 특혜를 주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일화 한 토막. 정부는 당시 수출기업에 대해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 를 적용했다.

원자재 수입때 수출에 소요될 물량보다 더 들여오는 것을 인정해줘 수출하고 남은 원자재를 국내시장에 팔 수 있게 특혜를 준 것이다.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고 국내에선 구경도 못해본 제품을 내다팔기 때문에 수출업자들에겐 큰 이권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는 원자재 소요량의 18% 정도를 더 수입할 수 있도록 인정해주었다.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수출업자들이 당시 인기품목이던 나일론등 원자재를 마구 들여오다가 66년 가을 검찰 밀수합동수사반에 적발됐지요. 내가 朴대통령께 '지금 수출붐이 일고 있는데 이들을 구속하면 안됩니다' 라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잠자코 들으시더니 이후락 (李厚洛.73) 비서실장에게 '신직수 (申稙秀.70) 검찰총장에게 전화해 당장 수사를 중단하라고 해' 라고 지시하시더군요. 그러더니 나에게 '기업인들을 너무 많이 봐준 것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기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12%로 낮추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이 기업인 편을 들어주니 기업인들은 거리낄게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모든 길은 수출로 통한다' 는 말이 유행했다.

수출만 하면 대통령이 뒤를 봐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상당수 기업인들이 아직도 朴대통령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朴대통령은 또 집무실에 기업별 수출현황을 막대그래프로 그려놓게 해 수출실적을 매달 체크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관계부처와 기업을 독려했다.

그러다보니 수출업무를 직접 담당한 상공부는 '수출 스트레스' 를 가장 심하게 받았다.

오원철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국력의 척도를 수출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수출목표 만큼은 손수 책정했어요. 64년 1억달러 수출 때도 그랬고, 71년 10억달러 수출 때도 朴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어요. " 대통령이 세운 수출목표를 실무부서가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문기상씨는 "그때는 수출업자보다 상공부 관리들이 더 설쳤다" 며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관료주도형 경제성장이 '한강의 기적' 을 낳는데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다.

60년대와 70년대 경제개발의 중심축을 담당한 경제관료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새 경제모델을 필요로 한 시기에도 '과거의 영화' 에 집착해 변신에 실패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화시대에 갖가지 규제로 묶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발목잡는" 존재쯤으로 인식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朴대통령의 제일 관심사가 수출이다 보니 수출업무를 담당하는 상공부의 발언권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상공부는 수출업자들에게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

일반대출 이자율이 25%였던 68년의 경우 수출 기업인에 대한 수출특융 이자율은 6%였다.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다.

또 수출소득에 대해서는 80%까지 소득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 하늘의 별 따기였던 해외여행도 수출업자에게는 예외였다.

60년대 운동화와 고무제품등을 수출하던 동신화학 전무였던 임호 (林虎.68.삼보주식회사 대표이사) 씨의 증언. "당시 수출회사라고 하면 관청이나 은행에 가서 목에 힘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정부가 수출업체를 배려해 주었죠. 그러니 뭐든지 만들어 수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혜는 정부의 선정대상에 포함된 소수 기업에 해당되는 얘기였다.

당연히 특혜를 받지 못하는 기업들은 특혜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

특혜대상 기업은 물론 특혜를 받으려는 기업들도 때론 입막음과 감사의 표시로, 때론 로비를 위해 기회있을 때마다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작은 뜻 (微意 또는 寸志)' 과 '성금' 을 건넸다.

이 부정부패의 고리는 지금까지 우리사회 발전에 큰 짐이 되고 있다.

이런 부작용을 남기면서도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결실을 거둬 66~70년 연평균 수출성장률은 36.8%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70년대초 정부에서 내걸었을 때 코방귀의 대상이었던 '80년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수출 1백억달러 달성' 이란 목표도 3년 앞당겨 77년에 달성했다.

朴대통령은 지방순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현장방문을 즐겼다고 한다.

오원철씨의 증언.

"하루는 朴대통령께서 수출용 스웨터를 만드는 마산 한일합섬 섬유공장에 들렀습니다.

朴대통령이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공은 '공부 못한게 한입니다.

영어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어요'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朴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김한수 (金翰壽.작고)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金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고 朴대통령께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학교가 생겨났어요. 朴대통령은 나중에 문교부장관을 불러 정규학교와 동등한 졸업장을 주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수출신화' 가 있기까지 근로자들이 치른 희생은 컸다.

대통령의 일회적인 온정주의 시책으로 근로환경이 개선될리 없었다.

70년 11월 평화시장 근로자 전태일 (全泰壹) 씨가 동료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수출제일주의와 고도성장의 화려함 뒤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한 단면이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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